제1화
권서아는 귀하게 자란 얌전한 아가씨였지만, 하필이면 업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바람둥이인 김도균을 사랑하게 되었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김도균의 여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김도균의 곁에 남기 위해 여러 가지 자세를 익혔고 그의 갖은 취향에 맞춰주며 밤낮없이 원하는 그를 받아 주었다.
감정이 고조될 때면 김도균은 늘 권서아의 귀에 바짝 다가가 낮게 속삭이곤 했다.
“자기야, 정말 최고야. 배우는 게 참 빠르네.”
“힘 좀 빼, 너무 조이지 말고.”
“그래, 바로 이거야. 자기야, 정말 사랑해.”
권서아는 김도균의 곁에 가장 오래 머문 여자였다.
그 기간이 어찌나 길었던지,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가 이제는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던 오늘 밤, 김도균은 통창 앞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눈 뒤 권서아를 데리고 한 파티에 참석했다.
방 안은 눈부신 조명과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음악으로 가득했으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유흥의 열기로 가득했다.
김도균은 권서아의 손을 잡고 상석에 앉았다. 그때 세련된 차림의 한 남자가 다가와 눈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넸다.
“보아하니 우리 도균 도련님도 이번엔 진짜로 방탕한 생활을 접고 정신 차린 건가?”
김도균은 웃으며 꼭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진정한 사랑이지.”
두 남자는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이내 불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균아, 정말 사랑에 빠진 거야? 그럼 약혼녀 쪽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상대는 너랑 집안 수준도 딱 맞는 배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게다가 열흘 뒤면 결혼식인데, 뭐야, 설마 파혼이라도 할 생각이야?”
김도균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응, 사랑에 빠진 건 맞지. 이 여자 몸에. 결혼식은 당연히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내 아내는 집안 수준이 맞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이 여자? 그냥 장난감일 뿐이야.”
옆에 앉아 있던 권서아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깍지 낀 손으로는 여전히 남자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지만, 마음은 마치 얼음 구덩이 속으로 떨어진 듯했다.
‘약혼녀?’
권서아는 귓가에서 이명이 들리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김도균에게 약혼녀가 있다고? 난 고작 장난감이고?’
하지만 그녀를 더 충격에 빠뜨린 것은 ‘집안 수준이 딱 맞는 배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말이었다.
권서아가 알기로 김씨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가문은 항성의 배씨 가문뿐이었다.
항성 배씨 가문의 가주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는데, 딸은 대중에게 단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그 항성 배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자 명실상부한 배씨 가문의 아가씨였다.
다만 권서아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권서아가 창백한 안색으로 자리에 앉아 있자 옆에 있던 김도균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자기야, 우리 지금 사업 이야기하는 중이야. 일부러 네가 못 알아듣는 언어로 말한 게 아니라 전문 용어가 섞여 있어서 그래.”
무력감이 권서아의 마음을 끝없이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녀는 목이 메어왔지만 애써 덤덤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계속 얘기해요, 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말을 마친 권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방에서 빠져나왔다.
세면대 앞에서 거울 속 창백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배씨 가문의 아가씨인 권서아는 8개 국어에 능통했고 불어를 못 알아 들을 리가 없었다.
3년 전, 권서아는 한 경매장에서 김도균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김도균은 대외적으로 바람둥이 이미지가 강했기에 그녀의 아버지인 배기훈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녀는 배기훈의 허락을 얻기 위해 단식 투쟁까지 벌였고 결국 딸을 지극히 아꼈던 아버지가 항복했다.
배기훈은 그녀가 김도균을 쫓아다니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딱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바로 그녀가 배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는 김도균이 사랑하는 것이 배씨 가문의 배경이 아닌, 인간 권서아라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 후 3년 동안, 권서아는 배씨 가문의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권서아는 가슴속에 고통과 의구심이 쌓여 폭발할 것만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오빠 배현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연결된 전화기 너머로 미세하게 떨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아니?”
다시 듣게 된 익숙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권서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메어오는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뗐다.
“오빠, 나야. 혹시 새로운 여동생이 생겼어? 아니면 아빠한테 새 딸이 생겼다거나? 정말 날 버린 거야?”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그럴 리가 있겠어! 내 여동생은 영원히 너 하나뿐이야!”
권서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이내 배기훈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서아니? 서아야, 아빠한테 딸은 너 하나뿐이야. 너는 영원히 우리 배씨 가문의 유일한 아가씨야!”
그 간절한 목소리는 마치 전화선을 타고 넘어온 듯 끝없는 온기로 권서아를 감싸며 얼음장 같던 그녀의 마음을 녹여주었다.
권서아는 울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숨소리조차 떨리기 시작했다.
“서아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집 대문은 언제나 너를 위해 열려 있어. 아빠는 늘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단다.”
권서아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억눌렀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뗐다.
“아빠, 저 집에 가고 싶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기 너머에서 배기훈이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아빠가 지금 당장 전용기 보내서 데려올게!”
권서아는 고개를 저었다가 상대방이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아니요, 아빠.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좀 있어요. 열흘 뒤에 제 발로 돌아갈게요.”
전화를 끊고 나니 그녀의 두 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로 얼굴을 씻어내는데, 등 뒤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이내 커다란 두 손이 권서아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익숙한 온기가 담긴 그 손이 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지며 잔뜩 긴장해 있던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기야, 어디 안 좋아? 왜 이렇게 오래 있어?”
김도균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걱정 어린 기색마저 서려 있었다.
권서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붉어진 눈시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기 서린 눈빛으로 김도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균 씨, 당신 나랑 결혼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