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한서율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드디어 깼네요.”
의사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는 연민이 어려 있었다.
“유산으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어요. 조금만 늦었다면... 신도 못 살렸을 겁니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 도우미가 식사를 나르다가 자신이 쓰러진 채 있는 걸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의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족들이 너무하네요.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다룰 수 있죠? 특히 당신 남편... 전화해도 받질 않아요. 병원에 오면 꼭 한마디 해야겠어요.”
“의사 선생님.”
한서율은 조용히 그의 말을 끊었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시트를 꼭 움켜쥐었다.
“임신 얘기는... 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는 어차피 믿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의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병실을 나섰다.
...
그 후로 며칠 동안, 윤재헌은 단 한 번도 병원에 오지 않았다.
대신, 한세린의 SNS에는 매일 그의 흔적이 올라왔다.
첫째 날, 전복죽 사진 한 장.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
둘째 날, 침대 옆에 엎드려 잠든 윤재헌의 옆모습.
[오늘 밤 또 악몽을 꿨는데, 눈 뜨자마자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한서율은 그 글을 무심코 읽다가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렸다.
그녀가 아플 때마다, 윤재헌은 직접 전복죽을 끓여줬었다.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할 때도 그는 손을 꼭 잡고 곁을 지켜주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다정함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따뜻한 눈빛도, 부드러운 말투도 모두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
퇴원 당일, 윤재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 차 보낼 테니까 타고 와.”
한서율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전화를 끊자, 그녀는 손끝으로 평평한 아랫배를 천천히 쓸었다.
이제 윤재헌은 그녀의 연락처에서 곧 사라질 이름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에게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한세린이 화판을 들고 벽 위에 물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윤재헌과 한서율의 결혼사진,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사진 위에는 알록달록한 물감이 뒤범벅돼 있었다.
그녀는 돌아서며 환하게 웃었다.
“서율이 왔구나? 벽이 좀 지저분해서 새로 꾸며보려던 참이야. 괜찮지?”
한서율은 난장판이 된 거실을 한참 바라보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이제 이 집은 그녀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앞으로 이 집의 안주인은 자신이 아닐 테니까.
그때, 윤재헌이 주방에서 과일 접시를 들고나왔다.
한서율이 계단으로 향하자, 그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린이랑 우리 관계, 풀어보자는 거였어. 근데 계속 이렇게 무례하게 나올 거야?”
그녀의 얼굴에 피곤한 웃음이 스쳤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무릎이라도 꿇고, 제 사진 망가뜨려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그만해, 재헌아, 서율이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한세린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일부러가 아니라도, 그런 저주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한서율, 넌 정말 나를 실망시켰어.”
한서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어깨를 밀치고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
그녀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눕혔다.
유산 후의 몸은 여전히 허약해, 숨을 쉴 때마다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라더니 한세린이 들어왔다.
얼굴에 남아 있던 부드러움은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차지했다.
“재헌이가 널 감싸는 거 보니까 속상하지? 그러게, 내가 뭐랬어? 재헌이한텐 넌 그냥 잠깐의 장난일 뿐이라니까. 근데 넌 그걸 진심으로 믿었다니, 참 웃기다.”
한서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돌려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한세린은 멈추지 않았다.
“너, 밖에서 사람들이 뭐라는지 알아? 자기 친언니 남편이랑 4년 동안 잠자고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여자래. 차라리 업소 여자들이 낫겠다 그러더라. 그러니 서율아, 이제 좀 현실을 둘러봐. 재헌이도, 한씨 가문도 널 원하지 않잖아. 넌 네 엄마처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짐 덩이야.”
엄마라는 단어가 귀에 스치는 순간, 한서율은 몸을 번쩍 일어켜 세웠다.
“언니 그렇게 흥분하는 거... 혹시 불안해서 그래요?”
“뭐?”
“이 4년 동안 재헌 씨가 정말 저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닐까 봐 불안한 거냐고요?”
한세린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곧 비웃음이 터졌다.
“사랑? 재헌이가 진짜로 널 사랑했다면, 내가 널 모욕할 기회를 줬을까?”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한서율은 이불자락을 꽉 움켜쥔 채, 몸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떠날 수 있으니까. 다시는 이런 추악한 얼굴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