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서나연은 휴대폰을 꽉 쥔 채 따지듯 물었지만 수화기 너머 들려온 건 냉랭한 유재민의 목소리였다.
“서나연, 네가 연구원에 온 이유... 원래 내 곁에서 일하고 싶어서 아니었나?”
그는 담담하지만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런 겉치레 명예들은 네게 중요하지 않아. 내 팀 안에 있으니 넌 안전하고 미래도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유진이는 달라. 유진이는 성과가 필요해서 이 분야에서 자리 잡고 더 멀리 나아가야 해.”
서나연은 너무 공허해졌고 온몸의 피가 한순간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이 승진 기회를 포기하고 단지 유재민 곁에서 조수로서 헌신한 이유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노력과 양보를 자신이 마음대로 처리해도 되는 ‘도구’로 여기고 있었다.
10년 동안 쏟아부은 용기와 노력은 유재민에게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과 채유진에게 더 필요하다는 가벼운 말들로 돌아왔다.
서나연은 이렇게 반박하고 싶었다.
“왜 네가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은지를 결정해? 내가 몇 달 밤을 새워 얻은 데이터... 그게 몇 번이나 실패했는지 알아?”
하지만 결국 그녀는 피로에 지쳐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연구원은 곧이어 중요한 학술 발표회를 열었다.
채유진 단독으로 등재된 논문이 이번 발표회의 핵심이자 하이라이트였다.
그녀는 단정한 드레스 차림으로 무대 위에 서서 논문 핵심 내용을 설명했다.
관중석에서는 사람들의 속삭임이 간간이 흘러나왔고 발표 자체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질문 시간이 되자 익명의 온라인 참가자가 공개 채팅창에 글을 올렸다.
[발표자 채유진 연구원의 학문적 신뢰성을 의심합니다. 이 논문의 핵심 데이터는 서나연 연구원이 초기 실험 기록에서 확인된 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데이터 출처에 대해 설명 바랍니다. 이는 동료 연구 성과를 도용한 것인지, 데이터 조작인지 여부가 궁금합니다.]
순간,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형 스크린이 해당 글을 확대 표시하며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채유진은 무대 위에서 얼굴이 창백해지고 당황스러움에 눈빛은 마구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은 곧장 유재민을 향했다.
사회자가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서나연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누구지? 누가 이런 일을 하는 거지?’
그녀는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복수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눈빛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유재민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나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유재민의 눈빛 속에는 숨김없는 의심과 깊은 실망이 담겨 있었다.
솔직히 무슨 말도 필요 없이 서나연은 이미 알아차렸다.
지금 유재민은 확신했다.
서나연이 저자 문제에 불만을 품고 익명으로 폭로했다고.
그가 보기에 그녀는 채유진의 앞날을 망치고 연구원 명성을 훼손할 수도 있는 여자였다.
유재민은 벌떡 일어나 관심과 놀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무대로 올라갔다.
그는 굳어버린 채유진의 손에서 마이크를 받아 들고, 소란스러운 현장을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했다.
“저는 유재민이라고 합니다. 방금 익명 질의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이 논문은 제가 전 과정에서 지도, 감독하며 수행된 연구입니다. 채유진 연구원이 주요 수행자이며 저는 제 학문적 명성을 걸고 보증합니다.”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시선을 서나연에게 돌렸다.
“서나연은 제 조교로, 일부 보조 업무와 문서 정리를 담당했을 뿐 이 연구를 독립적으로 수행할 능력은 없습니다. 이 연구 성과는 채유진 연구원이 낸 것이 확실합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고요.”
그 말에 관중석은 완전히 폭발했다.
“최고 책임자가 직접 보증한다고?”
“서나연은 단순한 잡일 담당이었군!”
“그래서 저자 명단에 없는 거였구나. 이제 이해됐어.”
서나연은 마치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채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곧, 유재민은 채유진을 바라보며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머지 내용 계속 진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