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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염미정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손바닥에는 손톱이 깊게 파고들어 피가 맺혔다. 사실 처음에 염씨 가문과 구씨 가문 사이의 혼인은 어디까지나 상업적 협력이었다. 염미정은 애초에 구시헌을 사랑하지도 않았지만 가문의 사업을 위해 그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시헌과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염씨 가문은 쇠락하기 시작했고 상황은 점점 악화했다.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염태수를 구해준 건 구시헌이었다. 그는 직접 자금을 투자해 회사를 회생시켰고 오히려 먼저 약혼을 제안해 이안 그룹의 주주들을 진정시켰다. 염미정은 처음에 구시헌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단지 구씨 가문이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가문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마지못해 혼인을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염씨 가문이 회복되면 혼약을 바로 깰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시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염미정의 생리 주기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그녀가 생리통으로 쓰러지다시피 아파할 때면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고 직접 따뜻한 차를 끓여 건네기도 했다. 구시헌의 어머니 김선아가 그녀를 괴롭힐 때면 여러 번 친히 나서서 그녀를 감싸주기도 했다. 다정한 약혼자 모습의 구시헌은 염미정이 꿈꾸던 사랑의 모든 조건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염미정은 진심으로 구시헌을 사랑하게 되었다. 반년 전, 구시헌은 적에게 납치되었고 염미정은 그를 구하기 위해 홀로 적의 소굴로 뛰어들었다. 결국 그녀는 구시헌을 구해냈지만 그 과정에서 뱃속의 아이를 잃게 되었다. 구시헌이 자책할까 두려워 그녀는 임신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납치 사건 이후, 구시헌의 태도는 갑자기 변했다. 그는 그녀에게 손대지 않았고 밤새 귀가하지 않는 날이 잦았으며 각종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변했다고 생각하며 파혼하겠다고 말했지만 구시헌은 이렇게 답했다. “너무 한 여자에게만 매달려있으면 업계에서 비웃음을 사게 돼. 나와 엮인 여자들은 모두 장난감일 뿐 그 누구도 너의 ‘미래 구씨 가문 안주인’ 자리를 흔들 수 없어.” 염미정을 달래기 위해 구시헌은 경매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분홍색 다이아를 낙찰받아 선물해 주었다. 새벽에도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기 위해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직접 운전해서 사러 갔다. 오랜 정은 말 한마디로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실제로 그녀에게 들킨 적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단순한 루머였다. 그래서 염미정은 마음이 약해졌고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그러나 그녀의 인내와 헌신으로 돌아온 것은 구시헌의 더 심해진 배신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절대 떠나지 못할 거라 믿었기에 계속해서 그녀를 밑바닥까지 짓밟았다. 하지만 구시헌은 염미정의 사랑은 실망이 쌓이는 순간순간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애정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염미정은 칼로 에는 듯한 심정으로 문을 열고 나섰다. 바로 그 순간,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파라치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카메라가 일제히 터지고 끝없는 질문이 폭탄처럼 쏟아졌다. “염미정 씨, 구 대표님이 방금 다른 여자가 새로운 여자 친구라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구시헌 씨가 이미 오래전에 염미정 씨와 헤어졌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구 대표님의 새 애인은 염미정 씨가 언니라고 했어요. 심지어 구 대표님께 그녀가 성장하기만 기다렸는지 염미정 씨와는 그냥 장난이었는지 물었지만 구 대표님은 반박도 안 하고 오히려 웃더군요...” 염미정은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온 건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차 안이었고 그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김선아였다. “염미정, 나는 그동안 네가 분수를 아는 애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감히 네 동생이 시헌을 유혹하게 놔두다니, 어떻게 이런 망신을 당하게 할 수 있어? 지금 당장 돌아와, 사당에서 무릎 꿇고 사죄해!” 뚝.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염미정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구시헌과 약혼한 5년 동안 단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김선아는 구시대적이고 고집스러웠다. 약혼한 날부터 수많은 규칙을 정해 염미정에게 현모양처가 되라고 강요했다. 아침 여섯 시면 무조건 일어나 김선아의 시중을 들어야 했고 매일 마시는 녹즙도 염미정이 직접 손질하고 준비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의 명문가 사모님들과의 사교 자리에도 계속 동행해야 했다. 잘해도 칭찬은 없고 조금만 실수해도 고함과 욕설이 쏟아졌다. 구씨 가문의 사당에서 무릎 꿇은 건 수십 번도 넘었다. 긴 소매와 긴 바지로 가려진 몸에는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구씨 가문의 사당. 늦가을의 밤공기는 살을 에듯 차가웠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 꿇은 염미정의 무릎은 곧 얼어붙을 듯했고 차가움은 팔다리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미움과 후회로 가득 찬 심정으로 하룻밤을 온전히 꿇어야 했다. 밤새도록 몸은 굳어가고 다리는 끊어질 듯이 아팠다. 그 시각 구시헌은 염미주와 함께 있었고 그녀에게 연락 한 통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염미정은 간신히 허락받고 사당을 나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별장으로 돌아오자 염태수의 전화가 걸려 왔다. “미주가 시헌과 사귄다고 하더구나. 한민준과 파혼하겠다고 난리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 염미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염태수는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아이고, 이토록 오랫동안 너는 아직도 시헌의 마음 하나 못 잡았구나. 그렇다면 미주 대신 네가 한민준에게 시집가거라!” 그리고 역시나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염미정은 비웃듯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예상했던 그대로네.’ 하지만 이번만큼은 더는 그 누구에게도 휘둘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모두 정략결혼이라면 이번에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할 거야.’ 그녀는 이내 누군가를 차단 리스트에서 해제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배경택 씨, 빠른 시일 내로 구시헌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할게요. 전에 하신 약속 아직 유효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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