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연민주가 99번 자살한 끝에 시스템이 그녀를 최재율 곁으로 돌려보냈다.
돌아온 지 2년이 되던 해 연민주는 최재율의 정장 주머니에서 산부인과 검사 결과를 발견했다.
[환자 성명. 정은희, 임신 12주.]
연민주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최재율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연민주를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시스템 임무를 안고 이 세계에 온 연민주는 최재율의 구원을 완성하고 그의 흑화로 인한 세상의 종말을 막아야 했다.
연민주가 최재율을 처음 만났을 때 이 남자는 최씨 가문 지하실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손목에 자해한 상처가 가득한 열일곱 살 소년은 몸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랐고 눈빛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연민주 머릿속에 있는 시스템에서 알람이 울렸다.
[경고! 목표 흑화 지수 99%, 세계 붕괴 카운트다운. 30일.]
연민주는 쪼그려 앉아 피가 흐르는 최재율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아파?”
고개를 홱 든 최재율은 다친 야수처럼 소리 질렀다.
“꺼져!”
이것은 최재율이 연민주에게 한 첫마디였다.
꽤 한참 후에야 연민주는 그때 상황을 알게 되었다. 최재율의 양부모는 주식 양도서에 최재율의 서명을 받기 위해 한겨울에 마당에서 무릎을 꿇리곤 했다.
연민주가 뛰어나갔을 때 눈은 어느새 최재율의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일어나!”
필사적으로 최재율을 끌어올렸다.
“넌 상관하지 마.”
최재율은 입술이 얼어서 시퍼렇게 질렀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최재율을 감싼 뒤 곧바로 그의 옆에 꿇어앉은 연민주의 모습에 남자는 깜짝 놀랐다.
“뭐 하는 거야?”
“난 신경 써.”
눈송이가 그녀의 속눈썹에 살짝 내려앉았다.
“네가 안 일어나면 나도 죽을 때까지 꿇어 있을 거야.”
그날 마당에 무려 여섯 시간이나 무릎을 꿇고 있던 두 사람은 결국 고열로 함께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났을 때 최재율은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왜...”
연민주는 기침을 하면서도 웃었다.
“네 목숨이 내 미션보다 중요하니까.”
[시스템 알림. 흑화 지수 -15%.]
그 후 최재율이 양아버지에게 술병으로 머리를 맞고 집에서 쫓겨났을 때 연민주는 다리 밑에서 만취한 그를 찾아냈다.
최재율은 피를 토하면서도 여전히 입에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어차피... 나 같은 쓰레기는...”
술병을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킨 연민주는 눈물이 흘리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내가 곁에 있어 줄게, 죽을 거면 같이 죽자!”
그날 밤 두 사람은 결국 위출혈로 병원에 실려 갔다.
병상에서 수액을 맞던 연민주는 몰래 최재율의 병실로 들어가 숨겨둔 딸기 사탕을 그의 손에 슬쩍 쥐여 주었다.
“간호사 언니가 그러는데 약 먹은 다음 이거 먹으면 아주 달대.”
손바닥의 사탕을 내려다본 최재율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쓴 것을 싫어한다는 걸 17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기억해 주었다.
[시스템 알림. 흑화 지수 -50%.]
그 후 연민주는 최재율과 함께 밤을 새우며 기획서를 만들고 그가 친부모를 찾는 데 동행하고 회사를 상장시키는 데 함께했다. 그 후 최재율은 경기도에서 가장 비싼 토지를 사 정원에 연민주가 가장 좋아하는 하얀 장미를 가득 심었다. 그리고 한 송이마다 쪽지가 묻혀 있었다.
[어제보다 오늘, 너를 더 사랑할게.]
[시스템 알림. 흑화 지수 0%.]
임무를 완수한 연민주는 이 세계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3년 동안 사라졌다. 그 3년 동안 최재율은 완전히 미쳐 있었다.
첫해, 전 세계를 미친 듯이 뒤지며 연민주를 찾은 최재율은 술로 스스로를 위로했으며 술을 마시다 위출혈로 서른여섯 번이나 입원했다.
두 번째 해, 평소 미신을 믿지 않던 최재율이었지만 삼보일배와 칠보일배를 연거푸 하며 청해에서 비다궁까지 큰절만 10만 번 넘게 했다. 무릎은 까지고 긁혀 살점이 드러날 정도였지만 최재율은 그저 하늘에 연민주가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세 번째 해,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최세호와 강경숙은 연민주와 눈매가 약간 닮은 여자를 찾아 최재율 곁으로 보냈다. 술에 취한 최재율은 정은희를 연민주로 착각했다... 그후 연민주가 돌아올 때까지 최재율 곁에는 정은희가 함께 했다.
늦은 밤 정은희를 보낸 후 연민주의 침대맡에서 사흘 밤낮을 꿇어앉아 있은 최재율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민주야, 그저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최재율 손목에 빽빽이 남아 있는 자해 흉터를 본 연민주는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그 후 최재율은 연민주에게 더 잘해 주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면 연민주가 다시 사라질까 두려워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모든 고객 접대도 취소한 후 칼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온 다음 연민주부터 찾았다.
천금을 들여 경매에서 가장 비싼 목걸이를 산 뒤 언론 기자들 앞에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 아내를 위해 산 겁니다.”
그런 최재율을 볼 때마다 연민주는 99번 자살하고 돌아온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산부인과 검사 결과지는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연민주의 심장을 깊이 찔렀다.
정은희와 헤어졌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최재율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였다.
복잡한 마음에 산부인과 검사 결과의 주소에 따라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간 연민주는 병원 VIP 병실 앞에 온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최재율은 아기를 안고 부드럽게 달래고 있었고 정은희는 그의 곁에 기대어 있었으며 강경숙은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애기가 재율이를 많이 닮았네!”
‘얼마나 화목한 가정이란 말인가.’
문밖에 있는 연민주는 혼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병실 안에 있던 강경숙이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민주가 알면 어쩌지?”
그 말에 최재율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절대 알 수 없어요.”
그러더니 정은희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한마디 했다.
“민주는 임신 못 해요. 이 아이를 입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적절한 기회를 찾아 민주를 설득해 아이를 입양하자고 할게요.”
“하지만 은희가 생모잖아!”
“엄마.”
최재율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제가 죽는 걸 또 보고 싶으세요? 나, 정은희와 못 헤어져요. 민주도 다시 떠나보낼 수 없어요.”
그러더니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저를 3년 전처럼 만들고 싶지 않으면... 아니, 이번에는 3년 전보다 더 끔찍할 거예요. 나는 민주 없이 살 수 없어요. 민주는 나에게 숨 쉬는 공기 같은 존재예요!”
강경숙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연민주가 사라진 3년 동안, 최재율은 사람이 아니라 그야말로 좀비 같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최재율이 옥상에서 자살을 하지 않을까 걱정돼 매일 가슴을 졸였다.
정은희가 온 후 최재율이 다시금 정상적인 사람이 돼가는 모습을 본 강경숙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병실 밖, 연민주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제 보니 자신은 최재율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공기였고 정은희는 그를 되살아나게 하는 햇빛이었다.
두 여자를 모두 놓을 수 없었기에 둘 다 원했다.
얼마나 우스운가.
연민주는 최재율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스템의 처벌을 받으면서도 죽는 방법을 99가지나 시도했다.
네 번째,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30층 높이에서 추락하는 순간 온몸의 뼈가 바닥에 부딪혀 분쇄성 골절이 일어났고 그때 부러진 뼛조각이 내장을 찔렀다.
열일곱 번째 손목을 그을 때 칼날로 창백한 손목을 톱질하듯 갈아 출혈이 일어나면서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결국에는 심장마저 경련을 일으켰다.
서른세 번째 물에 빠질 때 차가운 물이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순간 신경 세포에 고압 전기가 통한 것처럼 느껴졌고 기관지 안은 무수한 유리 조각이 뒤섞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물속에서 무려 8분 동안이나 버둥대다가 완전히 질식했다.
완전히 어둠 속으로 빠지기 직전 시스템의 기계음이 예정대로 들려왔다.
[횡단 실패, 생명력 0, 재시작 중...]
마지막에 죽을 때는 수면제를 삼켰다. 매번 호흡할 때마다 마치 뜨거운 용암을 들이마시는 것 같았고 신경 시스템이 온몸의 근육을 통제 불능으로 만들어 마지막에는 안구마저 움직일 수 없었다.
가장 잔인한 것은 의식이 또렷하다는 것이었다. 불규칙하던 심장박동이 점점 미약해지며 마지막에 긴 간격으로 쿵... 쿵... 소리가 나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시스템 알림음이 마침내 들려왔다.
[주인님의 집착 지수 임곗값 돌파, 복귀 허용.]
그 순간 연민주는 모든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서서 자신이 목숨을 바쳐 얻은 남자가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를 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민주는 절대 알지 못할 거예요.”
연민주는 여태껏 시도한 모든 죽음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이 느껴졌다. 마음은 마침내 산산조각이 났다.
“최재율.”
천천히 뒷걸음질 친 연민주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옥상의 바람을 맞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최재율, 그거 알아? 네 곁으로 돌아오기 전, 시스템이 자살했던 그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지울 건지 물었어. 그때 나는 안 지우겠다고 했어, 왜냐면 기억해야 하니까, 99번 죽으면서 널 만났지만 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중요하지 않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간 연민주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100번째 환생에서 나는 마침내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완전히 지우는 방법을 알게 됐어.”
복도에 온 연민주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를 눌렀다.
[시스템, 나 지금 후회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래.]
시스템의 기계음이 차갑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확정인가요? 포기할 경우 현실 세계의 모든 자산이 사라질 것이고 돌아간 후에는 거지가 되어 첫날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무의미한 컨트롤 패널을 바라본 연민주는 지난날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최재율이 눈보라 속에 무릎 꿇고 앉아 연민주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며 평생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했던 말, 연민주가 고열로 괴로워할 때 그녀의 손을 잡고 밤을 새우며 ‘민주야, 네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을 거야’ 라고 했던 말, 연민주가 사라진 3년 동안 사람도 귀신도 아닌 좀비가 되어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며 모두에게 연민주를 미칠 만큼 사랑한다고 했던 최재율, 하지만 알고 보니 미친 사랑도 변할 수 있었다. 깊은 사랑과 배신은 결코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코웃음을 친 연민주는 컨트롤 패널의 ‘확인’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들었다. 물론 떨리거나 긴장감 같은 건 일도 없었다.
“최재율.”
마지막 집착을 완전히 버리려는 듯 마지막으로 이 이름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나는 분명한 사랑만 원해... 100%가 아니면 0%. 하지만 너는 50%도 나한테 주지 못했어.”
연민주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눌렸다.
[확인.]
[전송 유예 기간 30일, 30일 후 주인님은 자유롭게 자살 방법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 후 영혼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소멸됩니다.]
연민주는 몸을 돌려 병원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노을이 유리창을 통해 비스듬히 안으로 비추자 복도 바닥에 연민주의 그림자가 길게 덮였다.
시스템이 웬일로 한마디 더 물었다.
[주인님, 남은 30일 동안 무엇을 하실 겁니까?]
창밖으로 서서히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연민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계속 연기를 하다가 다시 한번 최재율 몰래 사라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