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강다윤은 유씨 가문 운전기사의 딸이었다.
이런 신분의 여자는 원래 유씨 가문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3년 전 유하진이 교통사고로 영구적인 실명 진단을 받은 뒤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고 강다윤 말고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강다윤은 그를 3년 동안 보살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유씨 가문은 세상에 그녀가 유하진의 약혼녀라고 밝혔다.
약혼식 당일, 유하진은 갑자기 시력을 되찾았고 식은 그대로 중단되었다.
그는 방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이제 눈도 다 나았는데 내가 왜 운전기사의 딸이랑 결혼해야 해요? 우리 가문이 그 정도로 망했어요?”
이정미는 속으로 기뻤지만 대놓고 티를 낼 수 없어 겉으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윤이가 정성껏 널 돌보지 않았다면 네가 이렇게 빨리 회복할 수 있었겠니? 사람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돼. 하지만 감정도 강요할 수 없지. 조금만 더 지내보고 정말 성격이 맞지 않으면 그때 헤어지는 것도 늦지 않아.”
그렇게 이 약혼식은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다.
유씨 가문 쪽에서는 막내아들의 시력이 회복 중이라며 회복 치료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둘러댔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저 강다윤의 집안이 너무도 평범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연스럽게 내쫓으려는 수작임을.
하지만 욕을 먹는 건 이런 유씨 가문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강다윤이었다.
“거지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겠다고 하네. 몇 년 시중 좀 들었다고 자기가 정말로 뭐라도 된 줄 아나?”
“그러게. 재벌 집에 그렇게 쉽게 시집갈 수 있었다면 다음 생에는 나도 재벌가 운전기사 딸로 태어날 거야.”
그 시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강다윤은 이정미의 서재에서 무릎을 꿇고 조용히 훈계를 듣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강요할 수 없는 법이란다. 하진이가 널 좋아하지 않는데 내가 억지로 결혼시킬 수 없지 않니. 그런 결혼이라면 너도 행복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그간 정성껏 우리 하진이를 돌본 공은 있으니까 시간은 줄게. 석 달. 하진이가 그때도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하고, 싫다고 하면 2억을 줄 테니까 하진이랑 그쯤에서 끝내는 거야. 어때?”
강다윤은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이정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눈 밑 아래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려던 찰나 이정미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하진이 눈이 이제 막 회복되었으니까 술 마시면 안 돼. 네가 가서 데리고 와.”
강다윤의 아버지인 강명훈이 차를 몰아 강다윤을 술집 앞까지 데려왔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강다윤이 우산을 펴려 하자 강명훈은 그 우산을 빼앗았다.
“사모님이 그러셨어. 하진이가 네가 비 맞는 걸 보면 전처럼 가슴이 아파할지도 모른다고.”
초가을 공기는 이미 서늘했다. 차디찬 비가 강다윤의 어깨에 떨어지며 추위에 소름이 오소소 돋게 했다.
“아빠,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강명훈의 눈가가 붉어졌다.
“유씨 가문에서 네 엄마 목숨을 구해주고 우리한테 살 곳을 줬잖니. 사람은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난 이미 유호준 회장님께 사직서를 냈어. 수리가 되면 아빠가 너 데리고 이곳을 떠날 거야.”
강다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 소음과 요란한 조명이 뒤섞인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술집 안은 전기세가 걱정되지 않는지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강다윤은 몸을 흠칫 떨었고 곧 유하진이 여자 무리 사이에서 느긋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다가가려 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여자들은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유하진에게 다가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결국 하는 수 없이 목소리를 높이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잔 하나가 날아와 그녀를 명중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뭐야, 어디서 귀신이 우는 소리가 들리네? 소름 돋게.”
유하진의 시선이 가볍게 그녀를 흘겼다. 차가운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전날 밤 그녀의 품에서 애정 어린 말을 속삭이던 남자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강다윤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시력이 막 회복됐는데 술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돼요. 집에 가요.”
잠시의 정적 후 폭소가 터지며 누군가가 말했다.
“유하진, 네 집 가정부가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하네?”
“하하, 아내한테 잡혀 산다는 건 들어봤는데 가정부한테 잡히는 건 처음 보네. 정말 웃겨 죽겠어!”
이번에는 다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유하진, 네 가정부 꽤나 정성이던데, 나한테 양보하는 건 어때? 나도 정성스러운 돌봄을 받아보고 싶네.”
유하진은 커다란 소파에 기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입가에는 웃는 둥 마는 둥 한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강다윤, 내 체면을 깎은 대가, 감당할 수 있겠어?”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발끝으로 아직 따지도 않은 와인병을 툭 차버렸다. 그 병은 데구루루 구르며 강다윤 발끝에서 멈췄다.
“네 진심을 보여줘. 그러면 같이 가줄게.”
강다윤은 무심코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오늘은 생리 첫날이었던지라 생리통이 가장 심한 날이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녀가 생리통에 시달릴 때면 그가 항상 찜질 팩을 가져와 배를 따뜻하게 해주며 이렇게 말했었다.
“평소에는 네가 나를 돌보니까 오늘은 내가 널 돌보게 해줘.”
비록 그가 시력을 되찾은 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변했지만 그래도 옛정쯤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강다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입을 열려던 순간 유하진이 그녀의 손을 보고 차갑게 픽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강다윤은 모든 걸 깨달았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병을 집어 들고 코르크를 뽑아 단숨에 들이켰다.
와인을 마실 때마다 목이 움직였다. 그녀는 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마셨다. 유하진은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이상하게도 목이 바짝 말라왔다.
그 다음 순간 강다윤의 시야가 흔들리며 유하진의 어깨에 들려 바로 옆 빈 룸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