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한세희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남자가 전화받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아는 목소리였다.
“응. 적당한 데 아무 데나 갖다 버려.”
이도원의 목소리와 차갑다 못해 살얼음처럼 스며드는 음성.
“흐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 한세희의 마음은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저릿하게 아려왔다.
‘울지 말자. 울면 안 돼.’
울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수 없었다.
남자들에 의해 낡은 짐짝처럼 잔디밭 위에 내던져진 한세희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도원 때문에 우는 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그녀는 오직 그 문장만을 미친 듯이 되뇌었다.
한세희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비틀거리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병철은 잔뜩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볼일이라도 있는 거냐?”
그는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무심하게 물었다.
한세희는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을 꺼냈다. 얼굴이 부었음에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저 약혼, 할게요.”
한세희에게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들에 의해 이어진 상대가 있었다. 성인이 되어 그쪽에서 여러 번 찾아왔음에도 그녀의 마음은 늘 이도원에게만 묶여 있었고 답해야 할 순간조차 단 한 번도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씨 가문은 이제 예전 같지 않았다. 한병철은 그 결혼으로 조금이나마 체면과 이익을 메우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말에 한병철의 눈빛이 환히 밝아졌다.
“확실한 거냐? 그 거렁뱅이 놈은 이제 치워버린 거야?”
그 말에 한세희는 저도 모르게 얼어붙은 이도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 네, 이제 필요 없어요.”
“그래, 그래. 이 애비는 너를 믿고 있었지. 지금 당장 하림 그룹 쪽에 소식을 알려야겠다.”
한세희는 기쁨에 들떠 하림 쪽에 소식을 전할 준비를 하는 한병철은 뒤로하고 지친 몸을 끌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도원이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갈한 셔츠와 부드럽게 정리된 다크브라운 머리, 그는 마치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충견처럼 서 있었다.
‘아... 최지영 기다리고 있는 거구나.’
인기척을 느낀 이도원이 고개를 들었다.
“세희야, 왜 이렇게 늦게 와? 얼굴은 또 왜 그래?”
연기라 하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걱정.
‘... 연예계에 들어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야.’
이도원이 한세희의 손목을 잡으려 하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세희야... 오늘 일 때문에 나한테 화난 거야? 오늘은 내가 잘못했어. 근데 아무래도 지영이는 네 동생이잖아. 나는 네가 네 가족이랑 친하게 지냈으면 해서... 난... 네가 날 용서할 줄 알았어.”
진심 같아 보이는 이도원의 표정에 한세희는 순간 그녀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이도원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세희는 이도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뭐라 하든 이제 아무 의미도 없어.’
“... 응. 알았어. 용서할게.”
지금 그녀에게는 이도원과 실랑이를 벌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역시, 난 세희 너를 믿고 있었어. 참, 지영이가 내일 우리랑 같이 교외 나들이 가고 싶대. 사과한다는 의미에서... 내가 너 대신 허락했어.”
“하아...”
한세희는 더는 이도원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닫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날 밤, 꿈은 지옥이 되어 돌아왔다.
붉게 번지던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 열여섯 살의 축축하고 어두웠던 그 방. 그리고 남자의 기분 나쁜 웃음...
그날, 한세희는 끝내 밤잠을 설치고 말았다.
아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뜬 한세희는 이도원에게 끌려가다시피 아래로 내려갔다.
최지영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억 단위를 훌쩍 넘기는 고급 차 안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운전석에 있는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임태호.’
그의 모습을 본 순간 한세희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오랜만이네, 세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