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그 남자의 목소리와 표정은 몇 년 전의 그날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한세희는 다시 그 악몽 같던 밤의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열여섯 살.
또래보다 일찍 피어난 그녀를 업계에서 악명 높던 '인간 말종' 이 눈독을 들였고, 질투심에 눈이 먼 최지영은 한세희가 자신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라며 그 남자에게 도움을 줬다.
그날, 한세희는 약물에 취해 의식을 잃은 채 암실로 끌려갔다.
경찰이 제때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그날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이후 한세희는 그날의 트라우마로 오랜 상담 치료를 받아야 했다. 잠드는 것 자체에 공포를 느꼈고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그 방에서 깨어날까 무서워 밤마다 땀으로 이불을 적시며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버텨 겨우 어둠의 그림자를 몰아냈는데 모든 일의 원흉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녀 앞에 버젓이 서 있었다.
“언니, 내가 알기로는 언니랑 태호 오빠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거든. 시간도 꽤 지났잖아. 태호 오빠가 이번에 온 것도 언니랑 예전 일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고 싶어서 온 거야.”
최지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친근한 척하며 한세희의 팔을 엮어 감았다.
그녀가 ‘오빠’ 라고 부르는 임태호는 역겹도록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독사처럼 가늘어진 눈빛으로 위에서 아래로, 한세희의 전신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오랜만이다, 한세희. 더 예뻐졌네.”
그가 혀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훑는 순간, 한세희는 머릿속에 날카로운 번개가 친 듯 하얗게 울렸다.
반사적으로 최지영을 밀쳐낸 한세희는 말 한마디 없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세희야!”
이도원은 최지영을 감싸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찡그린 미간에 노골적인 비난이 담겨 있었다.
“세희야, 지영이는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동생을 폭행할 수 있어!”
뺨을 감싼 최지영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흐느끼는 목소리로 이도원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한세희를 똑똑히 겨누며 승리감에 찬 도발로 번들거렸다.
“괜찮아... 언니가 나 싫어하는 거, 이제는 익숙해.”
최지영은 연기에서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하필 많은 남자가 그 연기에 홀렸다.
이도원의 표정은 점차 연민과 분노로 뒤섞여 일그러졌다.
한세희는 공포와 분노로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언성을 높였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난 네 더러운 속셈에 관심 없어. 또 내 인생에 끼어들면 그땐 다 같이 죽는 거야, 알았어!? 내 말 가볍게 듣지 마.”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도원을 잃은 한세희도 더는 세상에 미련이 없었다.
전부 가진 사람보다 잃은 게 없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
한세희의 눈빛에 담긴 깊은 증오를 본 최지영은 순간 자리에 얼어붙었다.
한세희는 더 이상 그들의 역겨운 낯짝을 보기 싫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돌아서 걸음을 옮기자 시야가 금세 흐려졌다. 갈 곳은 없었고 세상은 터무니없이 넓고 막막했다. 그녀는 그저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사지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고, 감각이 무뎌질 무렵, 한병철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세희야, 당장 병원으로 와! 지영이가 너 찾다가 교통사고가 났어! 급하게 피가 필요해!”
‘나를... 찾다가?’
세상이 당장 무너져도 믿기 어려운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한세희는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그래요? 그냥 빨리 죽으라 해요.”
한병철이 통화 너머로 욕을 퍼붓기 전 그녀는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혹시라도 방해받을까 휴대폰 전원까지 꺼버렸다.
그러나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검은색 밴 한 대가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급정거했다. 한세희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차 문이 덜컥 열리며 건장한 남자가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주저 없이 그녀의 팔을 낚아채 잔혹한 힘으로 위로 끌어왔다.
“뭐야?! 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아?! 이거 놓으라고!!!”
한세희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남녀의 힘 차이는 너무나 컸다.
차 안으로 그녀를 끌고 온 남자는 재빨리 한세희의 입을 테이프로 막고, 손을 밧줄로 묶었다.
그는 한세희에게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오자 주저 없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조용히 해.”
대부분의 소리가 차체에 흡수되는 밴 안에서도, 앞좌석에 앉은 두 남자의 대화만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사람 데려왔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이동 중입니다. 그럴 리가요, 전부 백 도련님 덕분입니다. 도련님께서 저희 아가씨를 이렇게까지 챙겨주실 줄은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