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아무리 머릿속에 의문이 산더미처럼 쌓여도 운전기사는 묻지도 못한 채 묵묵히 운전만 했다.
윤라희를 병원에 데려다준 뒤, 차도겸은 이주성에게 전화해 윤라희가 왜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던 건지 오늘 밤 있었던 일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만약 자신이 차 안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그 상황을 목격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더 이상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성이 모든 경위를 보고해 왔다. 윤라희는 오늘 오후 차도겸을 찾아 회사로 왔지만 로비에서 제지당한 채 끝내 사무실로 들어가지 못했고, 퇴근 시간까지 건물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다 그의 차를 보고 쫓아가다가 그만 달려오던 차에 치이고 만 것이었다.
운전자는 자신이 사람을 친 걸 알고도 어두운 밤과 빗속이라 들키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윤라희를 그 자리에 버려둔 채 도망쳤다.
차도겸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꾹 움켜쥐었다. 두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입술은 분노로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
긴 침묵이 이어지자 이주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가해 운전자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마침 그때 수술실 등이 꺼지고 의사가 나왔다.
“경찰서에 넘겨.”
차도겸은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의사는 그를 보자마자 공손히 인사하며 다가왔다.
“상태는 어떤가요.”
차도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과로와 열사병 증상이 겹친 데다가, 폭우까지 맞으면서 고열로 실신하신 겁니다. 하룻밤 휴식하면 괜찮을 겁니다.”
차도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윤라희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아무런 생기도 없었다.
미간은 잔뜩 찌푸린 채, 마치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깊은 잠에 빠져 있다기보다는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차도겸은 잠시 곁에 서서 윤라희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후 병실을 나왔다.
그 뒤를 따르던 운전기사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아까까지 직접 병원으로 데려올 만큼 다급해했는데, 그냥 돌아간다고?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
의아하긴 했지만 차도겸의 속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윤라희는 머리가 멍한 상태로 눈을 떴다. 몸 전체가 축 늘어지고 기운이 없었다.
몸을 일으키자, 눈앞에 보이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병원? 누가 데려왔지?’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가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비를 그렇게 맞았는데... 서류는?’
윤라희는 가방을 확 끌어당겨 안에 들어 있던 서류봉투를 꺼내 확인했다. 다행히도 방수 가방이라 서류는 전혀 젖지 않았다.
그제야 윤라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휴대폰 화면에 뜬 시간을 보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젠장, 늦었잖아!’
막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찰나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어젯밤 윤라희를 병원에 데려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차도겸이었다. 게다가 떠나기 전, 간호에 신경 써 달라고 따로 당부까지 했던 터라, 평소 윤라희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간호사도 억지로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윤라희 씨, 깨어나셨네요.”
“네.”
윤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심히 물었다.
“누가 절 병원에 데려다준 거예요?”
“차 대표님이요.”
신발을 신던 윤라희는 순간 멈칫했다.
‘차도겸이? 분명 어젯밤 먼저 떠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차도겸을 쫓아가다가 결국 사고를 당한 거였다.
“그 사람은요? 지금 어딨어요?”
“어젯밤에 윤라희 씨를 모셔다드린 후 바로 가셨어요.”
윤라희의 몸이 살짝 굳었다. 이내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서류봉투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으니 내일 다시 돌려주기로 했다.
1층으로 내려가 간단히 간식을 사 들고는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촬영장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이미 지각이었다. 조서영의 매니저 진윤석이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
“돈 주고 대역 불렀더니 대접받으러 온 거예요?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못 하겠으면 그만두세요. 이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넘쳐나니까.”
주변 스태프들은 눈길을 주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을 뿐이었다.
윤라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윤석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소름 끼치도록 싸늘했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진윤석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이내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혀를 찼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한물간 퇴물 주제에.’
“쯧,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얼른 옷 갈아입고 촬영 준비나 해요. 또 늦으면 바로 짐 싸 들고 나갈 준비해요.”
윤라희는 몸이 찌뿌둥했다. 비록 열은 내렸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말 붙일 힘조차 없었던 그녀는 그를 무시한 채 탈의실로 향했다.
그녀의 맥 빠진 뒷모습을 본 진윤석은 코웃음을 치며 조서영의 개인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별것도 아닌 게 뭔 잘나가는 척이야.”
조서영은 방금 받은 네일을 내려다보다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왜, 또 누가 화나게 했어?”
“누구긴 누구야, 윤라희지. 몸 좀 아팠다고 생색은 혼자 다 내고 있어. 다들 아픈 와중에도 일하는데, 혼자 아주 죽을상이야.”
조서영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돌리며 비웃듯 말했다.
“아, 걔 얘기 좀 그만해. 듣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니까. 지금 중요한 건 걔가 아니라, 내일 있을 국악 경연대회야. 참가자 명단은 다 확인했어?”
요즘 윤라희는 더 이상 조서영에게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윤라희는 이제 진흙탕 속에 처박힌 채 아무리 몸부림쳐도 올라오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런 하찮은 존재에 신경 쓸 시간에 차라리 자신에게 중요한 무대 하나를 더 챙기는 게 낫다고 판단한 조서영이었다.
진윤석은 휴대폰을 스크롤 하며 말했다.
“서영아, 이번 대회 진짜 잘해야 돼. 내가 들은 얘긴데, 박범준 선생님이 이번 대회를 유심히 보고 있대. 괜찮은 참가자 중에서 한 명을 정식 제자로 들일 생각이 있으시다더라.”
“진짜야?”
조서영은 벌떡 몸을 일으켰고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박범준은 국악단 단장이자, 모두가 인정하는 국보급 배우로 국악계의 거장이라 불렸다. 국내 최초로 개인 독주회를 열었고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서 연주한 예술가였다.
워낙 까다롭기로 소문난 인물이라 수많은 학생을 가르쳤어도 누구도 그의 정식 제자가 된 적은 없었다.
그 덕에 학생들은 전국 곳곳에 퍼졌지만 그의 예술혼을 온전히 이어받은 이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도 없었다.
예전 ‘거문고군’을 제자로 들일 거란 말이 잠깐 떠돌긴 했지만 곧 뜬소문으로 밝혀졌다.
애초에 거문고군은 그냥 인터넷에서 뜬 연주자일 뿐, 박범준 같은 권위자가 그런 인플루언서를 제자로 삼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박범준이 직접 제자를 들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서영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양손을 그러쥐며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듯 각오를 다졌다.
박범준의 제자가 된다는 건 명성 하나로도 세계 진출이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따라오는 후광과 자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진윤석이 말을 이었다.
“박범준 선생님은 거문고를 유독 아끼셔. 돌아가신 부인이 유명한 거문고 연주자였잖아. 네가 거문고 전공이니까 기회는 분명히 있어.”
“응, 알아.”
그는 이미 참가자 명단을 꺼내 확인하고 있었고 그 옆엔 간단한 프로필도 붙어 있었다.
“이번 대회에 거문고 연주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더라. 너한텐 꽤 유리... 어? 뭐야, 왜 윤라희도 있어!”
“뭐?”
조서영은 깜짝 놀라며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화면에 뜬 마지막 참가자 이름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새하얘졌다.
‘말도 안 돼. 접수 마감일까지 윤라희 이름은 없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조서영의 얼굴은 금세 분노로 일그러졌다.
거문고의 기초를 닦아준 사람이 바로 윤라희였고 그녀의 연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조서영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윤라희가 이번 대회에 나왔다면 박범준의 제자가 될 가능성은 윤라희가 훨씬 크다는 얘기였다.
진윤석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너 지난 2년 동안 진짜 열심히 했잖아. 반면에 윤라희는 결혼하고 나서 뭐 제대로 연습이나 했겠어? 오히려 네가 우위일 수도 있어.”
조서영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지난 2년간 피땀 흘리며 거문고에 몰두했고 그 결과 실력도 많이 늘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윤라희 앞에서 언제나 위축되고 작아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화장품으로 치장해도 결국 자신은 윤라희의 ‘대역’이었다.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윤라희에게서 빼앗은 것들이었다.
그 사실이 항상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윤석 오빠, 나 자신은 있는데 혹시 모르니까 심사위원 쪽에...”
“안 돼,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이건 일반 대회가 아니야. 심사위원들 전부 업계에서 손꼽히는 권위자들이고 평판까지 흠잡을 데 없어. 그런 사람들 상대로 뒤를 봐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번 심사위원단은 모두 다섯 명으로, 국악단 부단장 강윤기, 저명한 국악 연주자 허성진, 국보급 배우 변정석, 서담예술대학교 부총장 이상철이었다. 이런 구성 앞에서 뒷거래를 운운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번 대회는 민속악기 분야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자리였다.
조서영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불안은 여전했지만 당장 신경 써야 할 건 코앞으로 다가온 리허설이었다.
그녀는 대기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다 윤라희가 앉아 있는 쪽을 지나치며 노골적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은 보기에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조서영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내일이 예선인데... 윤라희가 아프면 못 나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