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강인아는 각종 의료 기기가 산더미처럼 놓인 검사대에 누워 있었다. 귓가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대화가 들려왔다.
남자가 말했다.
“주씨 가문의 아가씨 팔자도 참 사납네. 막 시골에서 올라와 가족한테 기대려고 했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수술대에 올려 신장 하나를 떼겠다잖아. 이 얼굴이 아까워.”
여자가 타이르듯 말했다.
“작게 말해요. 이 아가씨는 아직 신장 하나가 떼어질 거라는 걸 몰라요.”
남자가 비웃었다.
“뭘 걱정해. 마취제를 충분히 주사하면 수술 끝날 때까지 곯아떨어질걸. 조직 검사 결과는 나왔지?”
“나왔어요. 기본적으로 장기 이식 요건에 맞아요. 도련님 병세가 악화해서 더는 못 미뤄요. 수술은 오늘 밤 7시로 잡혀 있어요.”
남자는 강인아의 티셔츠를 들추더니 손가락 끝으로 허리를 슬쩍 문질렀다.
“이렇게 매끈하고 하얀 피부에 구멍을 내야 한다니, 참 마음 아프네.”
남자가 더 치근덕거리려는 순간, 강인아가 번쩍 눈을 뜨며 눈동자에 싸늘한 살기를 번뜩였다.
여자가 놀라서 얼굴색이 새파래졌다.
“깼어요! 빨리, 빨리 정맥 주사해요!”
남자가 번개처럼 마취제를 집어 들고 다가오려는 찰나, 강인아는 한쪽 손을 올리며 그의 뺨을 후려쳤다.
“내 몸에 너같이 천박한 쓰레기가 감히 손댈 수 있을 줄 알아?”
마취 주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강인아는 성큼 한 걸음 내디디며 긴 다리를 들어 남자의 가슴팍을 세차게 걷어찼다.
남자는 포물선을 그리며 걷어차여 나가떨어졌고, 붉은 피 한 모금이 목을 뚫고 치솟았다.
형세가 나쁘다고 본 여자는 쏜살같이 문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문손잡이에 손도 대기 전에 온몸이 저릿해지더니 소털처럼 가느다란 은침이 목덜미에 박혔다.
뒤돌아보니 강인아가 손가락 끝에서 특이한 형태의 회전 펜을 빙글거리며 갖고 놀고 있었다. 바늘은 바로 그 펜 안에서 휘둘러 튀어나온 것이었다.
“너...”
겨우 그 한 글자만 뱉고, 여자는 아무 예고도 없이 그대로 까무러쳤다.
남자는 겁에 질려 온몸을 덜덜 떨었다.
“오, 오지 마! 우리도 남의 부탁을 받아 일하는 것뿐이야.”
강인아가 싸늘하게 웃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신장을 떼겠다니. 이봐, 의사 양반. 당신 커리어는 오늘로 끝났어.”
상대가 용서 구할 틈을 주지 않고, 강인아는 원래 자기 몸에 주사하려던 그 마취제를 남자 의사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줬다.
두 사람이 나란히 기절해 쓰러지는 걸 확인한 강인아는 몸에 붙지도 않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러고는 행거에서 흰 가운을 벗겨 느긋하게 걸쳐 입었다.
마스크를 쓰고 문을 단단히 가린 뒤, 강인아는 태연히 이곳을 떠났다. 그 사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피 뽑아 DNA를 검사한다는 핑계를 대고 나한테 약을 먹이려 들다니, 둘 다 어리석기도 하지.’
강인아는 이미 미리 대비해 둔 상태였다.
며칠 전, 자신을 그녀의 아버지라 자칭하는 남자가 찾아와, 그녀가 주씨 가문에서 잃어버렸던 친자식이라고 말했다.
남자의 이름은 주현석. 경시 요식업계에서 이름난 인물이었다.
딸이 전처를 따라 시골에서 고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그동안 못다 한 빚을 진심으로 갚고 싶다고 했다.
단 전제가 하나 있었다. 강인아가 이 사설 병원에 와서 친자 확인을 해야 한다는 것.
강인아는 생소한 혈연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주현석이 느닷없이 찾아온 데,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음모가 숨은 건 아닌지.
그래서 그녀는 상대의 수를 역이용해 그들이 짠 판에 맞춰 한바탕 연기를 펼쳤다.
역시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주현석이 무슨 보상을 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그는 그저 그녀의 장기에 눈독을 들였을 뿐. 새엄마가 주씨 가문에 낳아준 아이를 위해 신장을 기증받아 목숨을 이어 붙이려는 계산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강인아의 좌우명은 이랬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범하지 않는다. 만약 범한다면 반드시 응징한다.
주씨 가문이 그녀의 몸에서 장기를 뜯어 가겠다니, 그녀도 주씨 가문에 색다른 ‘대형 선물 세트’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같은 시각, 케리 호텔 꼭대기 층 레스토랑에서는 한 건의 계약 체결식이 진행 중이었다.
백 년의 역사를 지닌 백씨 가문은 경시에서 초월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가주 백세헌은 나이는 많지 않지만 전설 같은 인물로 사람들은 그를 회장님이라 불렀다.
백씨 가문과 계약하게 된 행운의 당사자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해커계의 신성으로 추앙받는 천재 소녀 주예원이었다.
그녀가 설계한 네트워크 보안 시스템은 얼마 전 상을 받았고, 경시에서의 명성과 기세가 압도적이었다.
백세헌은 주예원의 재능을 높이 사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내정해 두었다.
계약 현장에는 백세헌의 경호원과 비서들뿐만 아니라 주예원의 부모도 함께 자리했다.
“우리 예원이 앞으로 회장님께 잘 부탁드립니다.”
말문을 연 사람은 주예원의 아버지 주현석이었다.
마침내 백씨 가문 같은 문벌과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에 그는 더없이 들떠 있었다. 병원에서 신장 이식을 기다리는 아들 생각도 잠시 그의 머릿속에서 밀려났다.
진만옥은 한때 연예계를 주름잡던 톱스타였다. 그녀는 미소를 한껏 올리며 딸을 치켜세웠다.
“안텐 호텔에서 예원이 설계한 보안 시스템을 도입했으니, 회장님은 앞으로 편안히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주씨 가문 사람들의 열정 앞에서 백세헌은 기본 예의만 유지했다.
“그렇군요.”
주예원은 맞은편의 백세헌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는 신이 시샘할 만큼 잘생겼고, 귀하고 범상치 않은 기품도 그녀가 접해 본 부잣집 도련님들과는 아예 다른 차원에 있었다.
백세헌의 아내가 되는 것, 그것이 주예원 인생의 최종 꿈이었다.
식사 자리에 한껏 흥이 올랐을 때 조명이 깜빡거리며 꺼졌다.
진만옥은 영문을 몰라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십여 명의 경호원이 마치 자객처럼 사방에서 번개같이 달려와 절대 방어 태세로 백세헌을 안전 구역에 둘러쌌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 주씨 가문 사람들은 미처 반응조차 못 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달린 수천만짜리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갑자기 폭발했다.
폭발이 소방 경보를 건드렸고 천장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경호원이 번개같이 검은 우산을 펼쳐 주군이 물을 맞지 않게 했다.
그리고 백세헌은 왕자처럼 의자에 느긋이 앉은 채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이런 돌발 변고에도 놀라는 기색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진만옥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불이라도 난 거예요?”
주예원이 나서서 달랬다.
“엄마, 진정해요. 여기가 누구 땅인지 잊지 마요.”
안텐 호텔은 백씨 가문의 산업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 호텔은 정식으로 주예원이 설계한 보안 시스템을 가동했다.
이렇게 빨리 체면을 구기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시스템을 가동한 지 하루도 안 돼 이런 돌발 상황이 터졌다.
곧 경호원이 경보를 꺼서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물줄기도 서서히 멎었다. 우산을 받쳐 들던 경호원도 공손히 옆으로 물러섰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밀어 열었다. 검은색 야구 모자를 눌러쓴 강인아가 초대 없이 들어왔다.
그녀는 키가 훤칠하고 균형 잡힌 몸매였으며, 챙이 얼굴의 절반을 가려도 타고난 미모는 도저히 감춰지지 않았다.
백세헌이 강인아의 얼굴을 똑바로 확인하자 눈동자 깊숙이 놀람이 스쳐 갔다.
‘이 여자...?’
경호원들이 난입자에게 공격을 가하려는 기미를 눈치채고 백세헌은 소리 없이 제지했다. 부하들에게 정세를 지켜보라는 신호였다.
그는 보고 싶었다. 이 여자가 어떤 수를 쓰려는지.
강인아는 백세헌을 힐끗 한 번 보더니 곧장 그의 존재 자체를 무시해 버렸다.
정신을 차린 주현석이 가장 먼저 덤벼들었다.
“강인아, 너 여기는 왜 왔어?”
이 시간이라면 그녀는 사립 병원에서 신장 이식 적합성 검사를 받고 있어야 했다.
강인아는 검사 보고서 한 부를 휙 던졌다.
“증명만 되면 우리가 부녀 사이라는 이유로 주씨 가문 재산의 절반을 나눠 주겠다고 했죠? DNA 결과가 여기 있어요. 이제는 약속을 이행할 때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