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화

“아빠, 만약 혜리 이모 뱃속에 제 남동생이 있으면 엄마랑 이혼하고 혜리 이모랑 결혼하는 거죠?” 아이의 말에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노민준은 비록 다섯 살 된 아이를 둔 아빠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술잔을 든 그는 바람둥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영상 속 그는 화난 기색 하나 없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아들을 나무랐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제 말이 틀렸나요? 엄마도 그랬는데 혜리 이모는 왜 안 돼요? 올해 제 생일 소원은 혜리 이모가 제 엄마가 되는 거예요!” 말을 마친 뒤 노재우는 눈을 감고 진지한 얼굴로 케이크를 향해 소원을 빌었다. 흔들리는 촛불이 아이의 얼굴을 비추었다. 잠시 뒤, 눈을 뜬 노재우는 고개를 돌리더니 윤혜리를 향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고지수는 노재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라는 두 글자였기 때문이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고지수에게 영상을 보낸 친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불같이 화를 냈다. “재우 진짜 못됐다. 어쩌면 저렇게 배은망덕할 수가 있지? 너 재우 가졌을 때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었잖아. 게다가 재우를 낳을 때는 진짜 죽을 뻔했었지. 그동안 네가 얼마나 열심히 키웠는데 이젠 다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겠다고?” “노민준도 똑같아. 재우 생일인데 네가 아니라 자기 내연녀랑 같이 있잖아. 사람이 어떻게 그래?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어. 이제야 알겠네. 네 아들 노민준을 닮아서 그 모양인 거야. 노민준이 그런 인간이니까 재우도 그 모양이지. 그리고 그 윤혜리라는 여자 말이야. 비서 아니야? 어쩌면 저렇게 뻔뻔하지?” 심민지가 말을 마쳤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계속하여 고지수의 귓가에 맴돌았다. 고지수는 다시 한번 영상을 보았다. 노민준과 윤혜리는 아이의 양쪽에 앉아 있어 화목한 가족처럼 보였다. 윤혜리는 노민준이 2년 전 채용한 비서였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윤혜리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활력이 넘쳤고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고지수는 윤혜리를 두 번 봤었다. 한 번은 노민준이 술에 취해서 윤혜리가 직접 운전하여 노민준을 집에 데려다주었을 때였고, 또 한 번은 노재우가 아빠를 보고 싶다고 해서 노재우를 데리고 회사로 갔을 때였다. 그때 마침 추석쯤이어서 윤혜리는 고지수에게 스카프를 선물했고 고지수는 처음에 윤혜리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건 노재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노재우는 윤혜리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윤혜리는 노재우에게 예쁜 비서 누나에서 혜리 이모가 되었다. “혜리 이모는 못 하는 게 없어요. 정말 대단해요.” “엄마는 왜 이것도 몰라요? 혜리 이모는 아니까 혜리 이모랑 얘기할래요.” “엄마는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뭐든 안 된다고만 하잖아요. 혜리 이모는 안 그래요! 혜리 이모는 저한테 엄청 잘해줘요. 왜 혜리 이모가 우리 엄마가 아니에요?” 고지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민준에게 이 일을 언급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노민준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노민준은 그녀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라고, 억지 부리는 거라고 하더니 고지수가 자기 말에 반박하자 곧바로 표정을 굳히며 그녀를 나무랐다. “재우를 잘못 가르친 건 너잖아. 그런데 재우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싫어하는 거야? 고지수, 넌 좀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어.” 고지수는 진심으로 화가 나서 그 뒤로 노재우와 윤혜리가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몰래 만나고 있을 줄이야. 아들이 소리 없이 내뱉은 엄마라는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고지수의 폐부를 찔렀다. 고지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일주일 전에 예약해 둔 케이크였고 그 옆에는 그녀가 정성 들여 준비한 선물도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괴롭게 했다. 고지수는 오늘 노재우를 데리러 일찍 학교에 갔다가 선생님을 통해 노재우가 오늘 하루 병가를 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지수는 노민준에게 연락해서 물은 뒤에야 노민준이 노재우를 위해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노민준은 고지수에게 생일 파티에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윤혜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 거의 열 시쯤이 되어서야 노민준의 차가 별장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그는 차 앞쪽을 가로질러 조수석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윤혜리의 품에는 잠이 든 노재우가 안겨 있었다. 편한 옷을 입은 윤혜리는 청순하면서도 활력 넘쳐 보였는데 노민준의 곁에 서니 그야말로 선남선녀였다. 반대로 고지수는 심플한 홈웨어를 입고 있어 몸매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얼굴도 칙칙해 보였다. 윤혜리는 고지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고지수가 고개를 돌려 집에 있던 가정부 장민영을 향해 눈빛을 보내자 장민영은 곧바로 윤혜리에게서 노재우를 건네받은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민준이 윤혜리에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 내가 운전기사한테 바래다주라고 할게. 술 마셨으니까 운전하지 마.” 노민준은 곧바로 운전기사에게 윤혜리를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했다. 아주 다정하고 세심한 모습이었다. 노민준의 애정 가득한 눈빛을 바라볼 때면 그에게서 사랑받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었다. 과거 노민준은 종종 그런 눈동자로 고지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 다 나한테 얘기해. 내가 영원히 널 지켜줄 거야. 만약 나한테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네 간식을 다 먹어버리겠어!” 자신만만하게 약속하던 소년의 모습이 이제는 우습게 느껴졌다. 고지수는 윤혜리의 귀가 빨개지는 걸 보았다. 그리고 차를 타기 전, 고지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우쭐함이 보였다. 노민준이 계단 위로 올라가자 고지수가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는 얘기하지 않았어?” “재우가 너랑 같이 생일 보내기가 싫대.” “재우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려고? 재우가 윤혜리 씨를 엄마로 삼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허락해 줄 거야?” 노민준은 놀란 듯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화가 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날 감시한 거야?” 노민준은 차갑게 웃었다. “재우가 철이 없어서 몇 마디 한 걸 가지고 왜 그렇게 난리야? 유난 떨지 마.” 노재우는 누가 봐도 진지했는데 노민준은 그걸 진짜 농담이라고 생각한 걸까? 노민준이 늘 그런 태도였기 때문에 노재우가 점점 더 선을 넘는 것이었다. 노민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우가 어쩌다 생겼는지 잊지 마. 그냥 얌전히 지내. 아이를 봐서라도 내 아내 자리는 너에게 남겨줄 테니까.” 그 순간 고지수는 숨이 턱 막히면서 눈앞이 까매졌다. 장민영이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사모님, 괜찮으세요?” 고지수는 감정을 추스른 뒤 말했다. “재우는요?” “자고 있어요. 몸에서 술 냄새가 좀 나요.” 고지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샤워는 했어요?” “아니요. 건드리지 못하게 해서요.” “제가 가볼게요.” 고지수가 방문을 열었다. 노재우는 침대 위에 누워서 쿨쿨 자고 있었다. 몸에 술이 살짝 묻은 흔적이 보였는데 그것 때문에 술 냄새가 나는 듯했다. 고지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지수는 만 스무 살에 노재우를 가지게 되었다. 노민준과 고지수는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었고 고지수는 노민준을 아주 깊이 사랑했다. 그녀는 사춘기 때 노민준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고 그에게 고백도 여러 번 했었다. 8년 전, 고지수의 부모님은 노민준을 구하려다 돌아가셨고 노민준의 엄마는 고지수와 노민준을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노민준은 줄곧 이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고 그 탓에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했다. 고지수가 포기하려던 그날, 노민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우유 한 잔을 주면서 술을 마신 노민준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그렇게 노재우가 생겼다. 노재우를 낳고 싶었던 고지수는 몰래 도망치려다가 노민준의 엄마에게 들키게 되었고, 그 뒤로 노민준과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게 되었다. 아이를 출산했을 때 고지수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예상치 못한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걸 직감했고, 전업주부가 된 뒤로는 매일 아름다운 별장에서 남편과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고지수는 노재우를 바라보았다. 노재우는 노민준을 쏙 빼닮았다. 특히 노재우가 노민준과 똑같이 생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엄마가 최고라고 말할 때면 세상의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지수는 기꺼이 자신의 모든 걸 바쳐 노재우를 사랑했다. 노재우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노민준과 함께 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재우가 노민준을 너무 닮은 탓인지 고지수는 가끔 노재우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와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고지수는 아이의 옷을 벗겨주려고 했다. 단추 두 개를 풀었을 때 노재우가 잠에서 깼다. 노재우는 옷을 벗기 싫은 건지 몸을 뒤척였고 고지수는 그런 노재우를 달랬다. “우리 옷 갈아입고 샤워한 뒤에 자자. 응? 지금 몸도 지저분하고 술 냄새 때문에 머리도 아플 거야.” “싫어요.” “엄마 말 들어야지.” “싫다고 했잖아요!” 노재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더니 고지수의 뺨을 때렸고 고지수는 흠칫했다. 그녀 앞에 있는 이 포악한 아이는 노재우가 아닐 것이다. 노재우는 착하고 순한 아이였으며 가끔 장난꾸러기 같을 때가 있어도 이런 적은 없었다. 고지수는 노재우에게 똑같이 해주려고 했으나 본인이 낳은 아이였기에 일부러 힘을 조절하며 팔을 때렸다. 울음을 터뜨리는 노재우 앞에서 고지수는 분노를 억눌렀다. “엄마가 말했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고. 다른 사람을 때리면 너도 똑같이 맞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혜리 이모가 그랬어요. 이건 절 지키기 위한 거니까 괜찮다고요! 엄마 나빠요! 엄마 싫어요! 당장 꺼져요!” 노재우에게 밀쳐진 고지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노재우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동안 노재우에게 쏟아부었던 사랑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았다. 엄청난 피로감을 느낀 고지수는 몸을 돌려 방에서 나온 뒤 베란다에 한참을 서 있었다. 밤은 한없이 어둡고 또 길었다. 고지수의 인생 또한 이 깜깜한 밤처럼 지루하고 불행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고지수는 휴대전화를 챙긴 뒤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 고지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민영은 머리가 아프다고 난리 치는 노재우를 안고 아래 층으로 내려갔고, 노민준은 그제야 노재우가 술과 크림이 묻어서 지저분해진 옷을 여전히 입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화를 내며 말했다. “고지수는요?” “사모님은 새벽에 나가셨어요.” “아이도 내팽개치고 나갔다고요?” 장민영이 말했다. “어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어요.” “기분이 안 좋으면 아이를 내팽개쳐도 된다는 건가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하는 짓은 아이보다도 철이 없네요.” 장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민준이 분부했다. “일단 재우 씻기고 옷 갈아입힌 뒤에 병원으로 보내요.” “사모님께... 한 번 연락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늦은 시간에 외출했으니 걱정이 되었다. “늦어도 점심쯤엔 올 텐데 전화를 왜 해요?” 쫓아내도 소용없을 정도로 그를 깊이 사랑하는 고지수를 굳이 찾을 필요가 있을까? 아이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가정주부가 집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동안 고지수는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걸핏하면 집을 나갔었다. 그건 노민준이 자신을 찾아주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했지. 이렇게 유치한 짓을 아직도 하다니.’ 그러나 장민영은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노민준을 설득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예전에도 종종 이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챕터
1/100다음 챕터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