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세상에, 뭐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
조금 짜증이 난 고지수는 몸을 돌리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심민지는 이불을 다시 아래로 잡아당기며 고지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새벽 세 시에 갑자기 휴대전화로 누가 우리 집 문을 열었다고 알림이 오면 어떨 것 같아?”
“심민지, 적당히 해.”
“진짜 너무 좋아. 우리 지수, 오늘은 언니랑 같이 뜨거운 밤을 보내는 거야. 여기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네 그 인간 말종 남편이랑 답 없는 아들도 전부 잊고 앞으로는 내 곁에서 지내. 도둑질해서라도 내가 너만큼은 꼭 먹여 살릴게.”
고지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심민지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그 빌어먹을 놈들이 또 너한테 상처를 준 거야? 너 어제 재우 혼내긴 했어? 감히 다른 여자를 엄마로 부르려고 해? 나였으면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아주 혼쭐을 냈을 거야!”
고지수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았다.
“그 문제는 이미 몇 번이나 지적했었어.”
“...”
맞는 말이었다.
고지수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나 이혼하고 싶어.”
‘이건 진짜 좋은 소식이잖아!’
심민지는 신난 얼굴로 벌떡 일어서더니 별안간 뭔가를 떠올렸는지 다시 앉으며 말했다.
“홧김에 하는 말은 아니지?”
학창 시절, 고지수는 노민준에게 크게 상처받은 뒤 눈물을 훔치며 심민지에게 하소연했었다.
“나 이제 노민준이랑 놀지 않을래.”
그러나 노민준이 다시 여지를 주자 고지수는 상처받았던 걸 잊은 사람처럼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다.
지금은 노재우까지 있으니 노민준이 여지를 줄 필요도 없었다.
아이가 생기면 부부의 연을 끊기가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지수가 말없이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자 심민지가 물었다.
“그러면 재우는?”
결혼한 뒤 노재우는 고지수의 전부가 되었다.
심민지가 말했다.
“네 시어머니는 절대 재우를 데려가지 못하게 할 거야.”
“그건 두고 보려고.”
심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심민지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지수에게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하자고 했다.
억지로 고지수를 끌고 쇼핑하러 간 심민지는 신상 옷들을 잔뜩 집어 들며 말했다.
“넌 그동안 남편이랑 아이한테만 신경 쓰느라 너한테 너무 소홀했어. 네 남편이랑 아들은 네가 잘해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그래서 네 앞에서 그렇게 기고만장한 거야.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오늘 우리 예쁘게 꾸미자!”
그렇게 말하고는 고지수를 탈의실로 밀어 넣었다.
고지수가 안에서 나왔을 때 심민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직원을 불렀다.
고지수는 내향적인 사람이었기에 황급히 심민지를 말렸고 직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손님, 이 옷 정말 잘 어울리세요.”
고지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억눌려있던 자아가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심민지는 계산을 마치고 택을 자른 뒤 즐거운 얼굴로 고지수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수야, 나랑 같이 여기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밥 먹을까?”
고지수는 그녀를 꼬집었다.
“너 연예인이야. 사람 많은 곳은 피하는 게 좋아.”
“그러면 우리 돌아갈까? 네가 나한테 요리해 주는 거야. 재우는 네가 해준 밥을 먹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직 두 달밖에 안 된 아기인 나는 네가 해준 밥을 먹고 싶어.”
고지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심민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미친 소리를 했다.
“지수야, 너 이렇게 예쁜데 노민준 상사를 유혹해 보는 건 어때? 이름이 심동하였던 것 같은데.”
그들의 곁을 지나치던 남자가 잠깐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남자는 그중 한 여자의 옆모습만 보게 되었다.
여자는 피부가 아주 하얬다.
“이 백화점도 심동하 씨 거래. 돈도 많고 엄청 잘생겼다고 하던데 그 사람을 유혹해서 매일 그 사람 옆에서 네 남편을 괴롭히라고, 아니다. 네가 심동하 씨랑 잘 되면 노민준은 네 전남편이 되겠네. 심동하 씨한테 네 전남편을 엿 먹이라고 하는 거야.”
“...”
심민지는 꽤 계획적이었다.
“어쩌면 심동하 씨가 소유욕이 엄청난 사람이라 널 일부러 사무실로 끌고 가서 네 전남편 들으라고 사무실 안에서 네게 키스할지도 몰라.”
심민지는 헛기침을 하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흉내를 냈다.
“지수 씨, 지수 씨도 전남편이 일자리를 잃는 건 바라지 않겠죠? 그렇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한테 키스해 봐요.”
“...”
심민지는 그렇게 말하더니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어머! 진짜 너무 자극적인데?”
“...”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심민지는 고지수가 동조해 주기를 바랐다.
“자극적이지?”
심민지는 대충 대꾸했다.
“그래, 그래.”
심동하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심동하를 따라서 백화점을 둘러보다가 이런 상황을 겪게 될 줄이야.
심민지는 망상을 이어갔다.
그녀는 고지수가 노민준을 버리고 윤혜리와 은혜를 모르는 노재우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심민지는 고지수를 안은 채로 멀어졌고, 심동하는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심동하의 옆에 있던 장문식은 뭔가 말하고 싶었으나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그였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부하의 아내가 상사를 넘보다니... 심지어 상사를 상대로 망상까지 하네.’
심동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 아내죠?”
장문식이 말했다.
“노민준 씨 아내인 것 같습니다.”
조금 전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노민준의 아내는 현모양처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장문식이 말했다.
“노민준 씨 집안에 요즘 문제가 생겼나 봐요.”
심동하가 대답했다.
“그럴 만도 하죠.”
속물인 데다가 매우 가볍고 망상하기 좋아하는 아내를 두었으니 말이다.
...
심민지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이 났다. 그녀는 고지수를 사랑하게 된 심동하가 노민준에게 빨리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고 꺼지라고 재촉하는 시나리오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신난 나머지 발을 헛디뎌 삐끗했고 고지수는 그런 심민지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멀리서 장민영의 모습이 보였는데 노재우를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고지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그녀에게로 달려갔지만 윤혜리를 본 순간 마음이 차게 식었다.
의사가 처방전을 건네며 말했다.
“열이 조금 나요. 부모님들은 앞으로 아이에게 조금 더 신경 써주세요. 오늘은 수액만 맞고 집으로 돌아가시면 돼요. 그리고 아이 식습관에도 많이 신경 써주세요.”
몸을 돌린 장민영이 고지수를 발견했다.
“사모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고지수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재우가 병원에는 왜 온 거예요?”
“열이 조금 나서요.”
노재우에게 손이 닿기도 전에 노재우가 고지수의 손을 쳐냈다.
“다 엄마 때문이에요!”
고지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제 외출해서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고, 옷도 갈아입지 않으려고 한 사람은 너야.”
노재우는 고지수를 째려보더니 윤혜리를 향해 두 팔을 뻗으면서 일부러 약한 척하며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리 이모, 안아줘요.”
윤혜리가 노재우를 품에 안았다.
“재우야, 엄마한테 그러면 안 돼. 엄마가 싫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노재우는 윤혜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고지수 쪽은 바라보지도 않으려고 했다.
“엄마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엄마 정말 미워요. 너무 미워요!”
장민영은 안절부절못했다.
“사모님...”
그 순간 고지수는 그 자리에서 윤혜리와 노재우의 따귀를 때리고 마치 미친 여자처럼 히스테리를 부리며 욕설을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너무 많이 쌓아둬서, 원망도 너무 많이 쌓여서 이제는 말싸움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리고 결과 또한 뻔했다.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고 결국 본인만 힘들어질 것이다.
윤혜리는 엄숙한 표정으로 노재우를 혼냈다.
“재우야,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노재우는 뾰로통한 얼굴로 윤혜리의 어깨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사이좋은 모자 같아 보였다.
윤혜리가 말했다.
“저는 재우 데리고 수액 맞으러 가볼게요.”
장민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지수와 윤혜리를 번갈아 보았다.
“사모님, 저는 우선 재우부터 살필게요. 재우 지금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네. 그러면 가보세요.”
장민영은 황급히 윤혜리와 노재우를 따라갔고 고지수는 다시 심민지를 찾으러 갔다.
심민지는 벽에 기대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고지수를 바라보았다.
“누구를 만났길래 날 버리고 간 거야?”
“재우.”
심민지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재우 어디 아파?”
“그렇대.”
고지수는 잠깐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재우 보살펴줄 사람 있어.”
“그래...”
심민지는 고지수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내 집으로 갈까?”
“일단 나랑 같이 우리 집에 좀 갔다 오자.”
심민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역시 고지수는 돌아가려고 했다.
“짐 좀 챙기려고.”
고지수가 집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보석이나 명품 가방들을 챙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등록증과 그녀가 아끼는 카메라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촬영은 그녀의 취미였고 대학 전공도 그것이었다.
심민지가 데뷔할 수 있었던 것도 고지수가 찍어준 그녀의 사진이 매우 화제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헐! 이거 엄청 비싼 주얼리잖아. 이 가방도 한정판이네. 이거 다 안 챙기려고?”
“응.”
심민지는 아쉬운 얼굴로 그것들을 내려놓은 뒤 절뚝거리며 고지수의 뒤로 걸어가 그녀의 짐 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심민지는 한참 뒤 물었다.
“그러면 재우는?”
고지수는 캐리어를 닫고 일어섰다.
“두고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