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여수민은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허겁지겁 길도 가리지 않고 어두운 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어떤 욕망을 억누르는 듯한 숨소리였다. 숨은 빠르게,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느리게 이어졌고,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집어삼키는 맹수 같았다.
거기에 금속이 부딪치는 듯한 맑은소리까지 섞여 있었는데, 뭐가 서로 부딪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해본 적 없다고 해서 본 적도 없는 건 아니다. 여수민은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자신이 남의 좋은 일을 방해했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하지만 도망칠 틈도 없었다. 그녀를 쫓아온 사람들이 이미 문 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젠장, 사람 어디 갔어? 분명히 이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걸 봤는데.”
“틀림없이 룸으로 들어갔을 거야, 빨리 찾아봐...”
여수민은 온몸이 심하게 떨렸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진정시키려 했다.
만월 클럽은 프라이버시가 아주 철저해서, 손님과 직원만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문을 열 수 없다. 저들이 시끄럽게 굴어서 보안요원이나 매니저만 출동하기만 하면 그녀는 안전해질 것이다.
역시나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곧 누군가가 달려와 소리쳤다.
“뭐 하는 겁니까!”
이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사람들은 보안요원과 매니저에게 끌려 나갔다.
드디어 조용해졌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낸 순간, 그동안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다른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숨소리가 남자의 점점 더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뒤섞였다.
여수민의 심장 박동 소리도 덩달아 또렷해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 생각을 했다. 그런데 금속이 서로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바로 그때 귓가에 아주 낮고 느긋한 신음이 들려왔다.
“가만히 있어요.”
어둠 속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묘하게 막 끝난 뒤의 여유가 배어 있었고, 살짝 쉰 듯해서 유난히 섹시했다.
눈이 부실 만큼 밝은 조명이 동시에 켜졌다. 여수민은 숨을 곳도 없이 벽에 딱 붙은 채 어찌할 바를 몰랐고, 긴장한 탓에 밝은 큰 눈이 더욱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는 방 안의 남자를 똑똑히 보게 되었다.
검은 셔츠에 정장 바지, 소매는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렸고, 휴지로 무엇인가를 감싼 채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손목에 찬 금속 시계와 벨트 버클의 은빛 가장자리가 조명에 반짝였다.
여수민은 그의 차가운 표정에 잠깐 압도되었다가 바로 본능적으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키가 190은 훌쩍 넘어 보였고, 어깨는 넓고 다리는 길었다. 몸매 비율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했다. 그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그녀를 훑어볼 때, 그 시선은 살피는 동시에 무언가 재는 느낌까지 풍겼다.
소위 말하는 상위 1%의 얼굴에 남다른 기품, 타고난 귀티가 무엇인지 눈앞의 남자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예쁜 눈에는 날카롭고 차가운 빛이 숨어 있었다.
여수민은 급히 두 손을 모아 주먹을 쥐듯 포개고. 얼굴에는 사과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어에서 간단한 사과를 뜻하는 동작이었다.
하준혁은 잠깐 멍해지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순수해 보이는 얼굴을 이리저리 훑었다. 그의 첫 반응은 대체 어디서 기어들어 온 야망 있는 여자냐는 것이었다.
바로 조금 전에도 그는 그런 여자를 하나 쫓아낸 참이었다.
그렇지만... 생김새는 그런 부류의 여자와는 달랐다. 보기에는 꽤 순진해 보였고 두 눈은 동그랗고 맑았다.
나이가 들수록 동공이 작아지고 더 이상 깨끗하지 않게 되며 세속에 물든다고들 말하지만, 하준혁은 이 눈 속에서 그런 탁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 맑았다.
그는 잠깐 정신이 아득해지며 머릿속에 똑같은 눈이 하나 떠올랐다. 동그랗고 웃을 때면 어리숙한 고양이 같은 눈. 다만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조금 흐릿해져 있었다.
잠깐 딴생각을 하던 하준혁은 곧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변기 안에 던져 넣고 물을 내린 뒤, 손을 씻고 나와 여자와 마주 섰다.
“듣기 좋았어요?”
그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수민의 속눈썹이 빠르게 떨렸다. 그녀는 욕망을 풀고 난 뒤라 조금 붉어진 그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아마 그는 아까 뛰쳐나간 여자친구와 다툰 모양이라 욕구를 풀지 못한 채, 혼자 어둠 속에서... 그런 거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그게 남에게 들켰으니 민망하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하나의 방법을 떠올렸다.
여수민은 휴대를 꺼내 재빨리 글자를 쳤다.
[죄송해요, 저는 장애인이라서 뭐라고 하시는지 듣지 못하고 말도 할 줄 몰라요. 아까는 룸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그냥 숨으려고 들어온 건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사실 그녀는 성대가 손상되어 말을 할 수 없을 뿐 들을 수는 있었다.
하준혁은 고개를 숙여 가늘지만 하얀 살갗이 드러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에는 일회용 밴드와 붕대가 여기저기 감겨 있었는데, 그런 손으로도 그녀는 놀랄 만큼 빠르게 글자를 쳤고 금방 한 줄을 완성했다.
그는 살짝 눈썹을 치켜세웠다.
‘장애인?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는 코로 짧게 웃음을 흘리더니, 그녀의 휴대를 빼앗아 들고 이렇게 쳤다.
[아까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때는 반응이 꽤 빠르던데요.]
여수민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답장을 쳤다.
[불이 켜져서요, 괜히 나갔다가 더 혼날까 봐 그냥 못 움직이고 있었어요. 다시 한번 죄송해요. 제발 용서해 주시겠어요? 저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하준혁은 다 읽고는 휴대를 그녀에게 다시 던져 주었다. 그리고 벽에 몸을 기대선 채 조용히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는 방금 전의 추측을 부정했다.
장애가 있는 여자라면 애초에 이런 곳에 놀러 오지도 않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끌려와서 노는 일도 없을 것이며, 그를 붙잡고 기어 올라가려 들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됐지 뭐, 장애가 있는 애를 괜히 궁지로 몰 필요는 없지.’
하준혁은 턱을 살짝 들어 올려 가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수민은 엄지손가락을 두 번 굽혀 보이며 감사 인사를 하고 활짝 웃어 보인 뒤 문손잡이를 돌려 나가려고 했다.
하준혁은 또다시 어리숙한 고양이를 떠올렸다. 웃을 때의 모습이 꼭 똑같이 볼 옆에 보조개가 두 개 패였다. 그의 마음이 스르르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신발 끈 풀렸어요.”
마치 만우절에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난처럼 단순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수법이었다.
여수민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신발 끈이 풀리기는커녕 자기가 신고 있는 슬립온 운동화에는 애초에 끈이라는 것이 달려 있지도 않았다.
‘속았다.’
여수민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대로 내달렸다가, 마침 마주 오던 키 큰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쳐 버렸다. 남자의 손에는 응급용 가방이 들려 있었다.
서재헌은 몸을 비켜 충돌을 피하고는 찌푸린 눈썹으로 그녀를 한 번 흘겨본 뒤 하준혁에게 물었다.
“저 사람 누구야? 너 약 효과 다 풀렸어? 됐다, 일단 채혈부터 하자...”
하준혁은 허겁지겁 도망치는 그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말투는 무심했다.
“벽에 기대 엿듣는 걸 좋아하는 바보 같은 고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