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여수민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마침 그 무리가 클럽 보안요원들에게 끌려 문밖으로 내던져지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감히 나가지 못하고 로비 한구석을 찾아가 앉았다. 기둥을 몸가리개 삼아 숨듯이 앉은 채 몰래 남자친구 남민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남민우는 십 분이 지나서야 답을 보냈다.
[수민아, 너 어디야? 나 실험실이야. 지도교수가 새로 온 여제자 챙기라고 해서 대략 십 분이면 끝나.]
여수민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으며 답장을 쳤다.
[늦은 시간에도 바쁘네요. 그럼 저는 혼자 돌아갈게요.]
벌써 열 시가 넘었다. 남민우가 여기까지 다시 오면 너무 힘들 것이다.
남민우는 머리 쓰다듬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
[얌전히 나 기다려. 너무 늦었는데 너 혼자 있는 거 나는 불안해.]
여수민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그녀는 위치를 하나 찍어 보내고, 남민우가 데리러 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거의 30분이 지났는데도, 남민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연경대에서 여기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여수민은 남자친구와의 대화창을 몇 번이나 눌러 들어갔다가 또다시 나왔다.
석사 2년차는 바쁘다. 그녀는 계속 메시지를 보내다가 남민우의 실험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되었다.
그녀가 조용히 앉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있을 때, 2층에서 두 사람이 내려왔다. 여수민은 무심코 그쪽을 쳐다봤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까 룸 안에 있던 그 남자였다.
아무래도 방금 일이 꽤 민망한 장면이었고, 이 남자는 겉모습만 봐도 신분이 보통이 아닌 게 티가 났다. 쉽게 건드릴 상대가 아니었다. 괜히 남의 재수 없는 날에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여수민은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조용히 있었다. 눈은 코를 보고, 코는 마음을 보는 것처럼 시선을 가만히 떨군 채, 두 손의 검지와 약지를 무의식적으로 포개어 엇갈리게 움직였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시야 안으로 검은 정장 바지가 들어왔다. 원단은 부드러우면서도 각이 잘 살아 있었고, 남자의 곧고 튼튼한 두 다리에는 은근한 힘이 실려 있었다.
여수민은 긴장해서 고개를 들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상대에게 내려다보이는 자세가 되자, 원래부터 기세가 강한 편이 아닌 그녀는 압박감에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일부러 속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상대가 너무 곤란해지지 않았으면 했을 뿐이었다.
여수민이 휴대폰을 꺼내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과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나른했고 음색은 낮은 첼로 같았다.
“들리기는 하는데 말은 못 해요?”
그녀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혁은 애초에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저 머리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달까.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그녀를 보자 어느새 이쪽으로 걸어와 버린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하준혁은 동그란 머리 하나만 먼저 봤다. 이마는 매끈하고 하얗고, 콧대는 곧게 솟아 있었으며, 코끝은 살짝 둥글어 귀엽게 무뎌 보였다.
볼수록 더 귀여워 보였다.
“뭐까지 들었어요?”
하준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어조에는 약간의 조롱기가 실려 있었다.
그는 전혀 피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수민은 이제 겨우 20살, 한창 얼굴이 잘 붉어질 나이였다.
우연히 남자의 욕망 어린 독무대를 통째로 엿들은 셈이라, 땅이 있으면 파고 들어가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물며 본인에게 직접 이런 질문까지 받다니 말이다.
그녀는 난감하게 그 자리에 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하준혁이 다시 물었다.
“괜찮게 들렸어요? 녹음은 안 했죠.”
여수민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좋게 들렸어요?”
하준혁은 일부러 어조를 끌어올려 말을 비튼 채 되물었다.
놀림을 받은 여수민은 난처해하며 서둘러 글자를 쳤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저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로 장난치지 않아요.]
그리고 직접 휴대를 넘겨 보여 주었다. 녹음도 없고, 영상도 없고, 사진도 없다는 증거였다.
하준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진첩 안에는 그림들뿐이었다. 미대를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장난치지 않고, 진지하고 성실한 그녀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랫배에 웅크리고 있던 불덩이도 함께 뒤집히는 것 같았다.
억누르긴 했지만 몇 번이고 굴러가는 마음속 생각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차가 안 잡혀요? 어디 살아요? 제가 모셔다드리죠.”
수년이 지나고 나서도, 하준혁은 이 말을 내뱉던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흥미’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비 온 뒤 솟아나는 죽순처럼 뼈와 피 속에서 마구 자라나던 느낌을 말이다.
그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과 물건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그랬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죽순의 끝은 억지로 흙 속으로 눌려 들어갔다.
여수민은 순식간에 글자를 다 쳤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남자친구가 곧 올 거라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하준혁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3초 정도 서 있었다. 입꼬리는 아래로 억눌린 채였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떠났다.
여수민은 숨을 고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각도에서는 통유리창 바깥이 눈에 들어왔고, 방금 그 남자가 친구와 함께 한 대 고급 승용차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그때 남민우도 도착했다.
여수민은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가 남민우의 전기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탔다.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그 고급 차는 여전히 시동이 걸리지 않은 채였다.
남민우는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늦게 도착한 것이 조금 미안했던지 먼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서야 헬멧을 씌워 주었다.
“수민아, 미안.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서. 여제자 실험 샘플에 좀 문제가 생겨서 그거 좀 도와주느라 늦었어.”
여수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수어로 빨리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옆에 있던 그 차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딘가 편치가 않았다. 까맣게 칠해진 뒷좌석 창 안에서 마치 누군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남민우가 알겠다고 말하고 몸을 돌려 핸들을 비틀자, 여수민은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전기자전거는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가 버렸다.
그제야 뒤에 있던 검은 차가 천천히 시동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준혁은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젖혀 기대고, 손을 뻗어 셔츠 깃을 잡아당겨 풀어 헤쳤다. 답답하고 더웠다.
그는 한 번 스스로 해결하긴 했지만, 방금 서재헌이 피를 검사했을 때 혈액 속에는 아직 약기운이 남아 있었다.
서재헌이 가져온 주사제를 한 대 맞았지만 아직 효과는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욕망이 치밀어 오르면 풀기가 쉽지 않다. 그의 얼굴빛은 썩 좋지 않았다.
하준혁은 조금 기분이 나빴다. 정확히 말하면 아주 많이 나빴다.
서재헌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아까 소개해 준 그 여자들은 왜 안 건드린 거야? 다 제대로 된 애들이고, 이상한 쪽 애들도 아닌데. 사실 몇 번만 풀어 주면 금방 괜찮아져.”
“관심 없어.”
“하, 역시 우리 하 대표답네. 눈은 하늘 꼭대기에 달려 있어서 차라리 깨끗한 왼손을 희생하더라도, 아무 여자한테도 싸게 굴고 싶지는 않은 거지.”
서재헌은 헛기침하듯 웃으며 멋대로 궁금해하는 얼굴로 더 가까이 붙었다.
“근데 방금 로비에 있던 그 애, 꽤 순해 보이던데? 너 이런 타입 좋아해? 안타깝게도 벙어리인 것 같고 남자친구도 있더라. 좀 애매하긴 하지. 그래도 네가 관심 있으면 내가 청순한 쪽으로 몇 명... 더 소개해 줄까...”
‘뭐가 애매하다는 건데.’
하준혁은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채로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조용하고 안 떠드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관심 없어.”
여전히 그 네 글자뿐이었다.
마침 차는 전기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녀 옆을 지나고 있었다. 소녀의 가늘고 마른 팔이 소년의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팔 아래로 고개를 쏙 내밀고 바람을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였다.
사이는 꽤 좋아 보였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한동안 유행했던 인터넷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차라리 자전거에 앉아 웃을지언정, BMW 안에서 울고 싶지는 않다.
하준혁은 문득 한 번 웃었다.
이제는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