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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여수민은 화들짝 눈을 떴다. 제일 먼저 휴대폰을 집어 들어 문자 화면을 열고, 12110을 입력한 다음 신고 문자를 적기 시작했다. 시간, 장소, 그리고 대략적인 상황까지 적었다. 밖에서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더니, 누군가가 문에 뭔가를 계속 내던지는 소리가 났다. 복도에 쌓아 두었던 종이상자들도 발로 걷어차는 듯했다. 여수민은 조심조심 문 쪽으로 다가가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남민우가 복도에 달아 둔 전구 하나가 어둑어둑하게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 서너 개의 그림자가 비쳤다. 만월에서 오늘 밤 내내 그녀를 쫓아다니던 그 깡패들, 그리고 손영후였다. 손영후는 머리에 붕대를 한 바퀴 둘렀고, 아래팔에는 불꽃 문신이 있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다. 지나치게 놀고먹은 티가 나는 얼굴에 담배를 물고 발로 문을 걷어차고 있었다. “벙어리년아, 얼른 안 나와? X발, 내 머리를 터뜨려 놓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아?” 여수민은 이 무리가 어떻게 자기 집까지 찾아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제 막 문자를 전송하려던 찰나, 아래층 두 집에서 동시에 문이 열렸다. 그중 한 집은 여수민이 다락방을 세 들어 사는 집의 집주인이었다. 연경 토박이 노부부로 둘 다 퇴직한 직장인이었고, 형편도 괜찮고 사람도 순했다. 외동아들이 언어장애인이라, 같은 장애를 가진 여수민이 딱해 보여 월세를 20만 원이나 깎아 주었다. 여수민이 괴롭힘을 당하는 걸 보자 집주인 할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당신들 뭐 하는 인간들이야? 한밤중에 우리 집 문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다른 이웃도 나와서 말했다. “나 경찰에 신고했어. 야밤에 소란 피우고 남의 물건 부수고, 우리 안 나왔으면 너희 지금 들어와서 범죄까지 저질렀겠네?” 손영후는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겁먹은 기색은 조금도 없고 허세 가득한 꼴이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그는 부하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썩은 달걀들을 여수민의 방문에 전부 던지라고 시켰다. “벙어리년, 잘 들어. 숨는다고 내가 너를 못 잡을 줄 알아? 오늘은 그냥 맛보기야. 뒤에 더 재밌는 거 많이 남았거든? 썩을 년, 좋은 말로 할 때는 말을 안 듣고 꼭 X같이 나와야 한다니까... 가자!” 한바탕 경고를 마치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떠났다. 내려가면서 아래층 두 집의 오지랖 넓은 이웃들 옆을 일부러 스치듯 지나가다가, 집주인 할아버지의 어깨를 툭 밀치고 갔다. 할아버지는 당장 욕을 퍼부으려 했지만 할머니가 팔을 붙잡고 말렸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서야 여수민은 문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껍데기 속에 숨은 거북이처럼 웅크려 있던 게 부끄러워 허겁지겁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웃들에게 사과와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제가 바로 복도 다 치울게요. 죄송해요, 최대한 빨리 문제를 해결해 볼게요.] 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떻게 깡패들한테 찍힌 거야? 쟤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게 되면, 집이 엉망으로 되는 건 둘째 치고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여수민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아요. 이따가 경찰 오면 도움을 요청해 볼게요.] “그래, 얼른 치워. 이 썩은 냄새 문밖에서도 다 올라와.” 여수민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위로 올라가 보니 자기 방문 앞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악취 나는 달걀물이 간장과 식초 같은 양념에 섞여 끈적한 기름기까지 뒤엉켜 있었다. 문이며 바닥이며 온통 뒤덮여 있었다. 여수민은 안으로 들어가 마스크 하나를 꺼내 쓰고, 청소 도구를 챙겨 나와 조금씩 더러운 자국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경찰도 도착했다. 그들은 먼저 신고자의 정보를 확인한 뒤 위층으로 올라와 여수민에게 상황을 확인했다. 여수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글자를 쳐서 경찰에게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물었다. [저 예전에 한 번 신고한 적이 있어서 아마 기록이 있을 거예요. 언제쯤이면 이 사람들한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저희가 최대한 빨리 찾을 겁니다. 그다음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벌할지는 조사 결과가 나와야 하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증거만 충분하면 범죄자는 절대 그냥 안 놔둡니다.” 여수민은 감사 인사를 하고 경찰을 배웅해 보냈다. 다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얼룩을 닦는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꾹 참았고 손은 쉼 없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웃들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 너무 큰 소리는 안 내려고 했고, 그래서인지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못했다. 다 치우고 나니 이미 새벽이었다. 휴대폰에는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남민우가 보낸 것이었고 세 시간 전에 도착한 문자였다. [오늘은 밤샘이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수민아, 잘 자.] 여수민은 조용히 화면을 꺼 버렸다. 습관처럼 카톡을 눌러 봤고, 모멘트에 남민우의 작은 프로필 사진이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터치해서 열어 보니 실험실 밖 긴 테이블 위에 고기구이와 커피, 밀크티가 가득 놓여 있는 사진이었다. 몇몇 같은 연구실 동료들이 하얀 가운을 입고 가위손을 그리며 서 있었고, 남민우는 맨 뒤에 서 있었다. 키가 커서 머리만 쏙 보였고 웃는 얼굴은 아주 온화했다. 제일 가운데 앉아 있는 여자애는 테이블 앞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고, 웃는 얼굴은 뜨거운 햇빛처럼 눈 부셨다. 손목에 낀 옥팔찌는 유리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머리 쥐어짜이기 직전 마지막 일탈.] 여수민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여자가 바로 남민우가 말하던, 응석만 부리는 여자, 그 재벌 집 공주라는 것을. 이렇게 예쁘고 환한 얼굴이었다니. 여수민이 밤새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눈가에서 한꺼번에 쏟아졌다. ... 남민우는 일을 마치고도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수민이 걱정되어, 결국 그녀가 사는 셋집으로 왔다. 이미 새벽 네 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지쳐서 비틀거릴 지경이었고,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그대로 쓰러져 그곳에 웅크린 채 잠이 들어 버렸다. 둘은 연애한 지 2년이 되었지만 아직 관계를 하지 않았다. 남민우는 여수민을 많이 배려해 줬다. 그녀의 목이 완전히 나은 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집안의 반대가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겠다고 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 약속도 없이 쉽게 그녀를 차지해 버리는 건, 여수민처럼 약한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뿐이라고 했다. 여수민은 인기척을 듣고 잠깐 눈을 떴다가 한참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일곱 시쯤, 그녀는 코를 꽉 집히는 바람에 숨이 막혀 깼다. 여수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남민우의 손을 떼어 냈다. 남민우는 웃으면서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우리 돼지 오늘은 늦잠까지 자네? 얼른 일어나서 아침 먹어.” 여수민은 아직 속이 좀 쓰려서, 그와 얘기하기 싫었다. 말없이 화장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남민우도 따라 들어와 익숙한 손놀림으로 치약을 짜서 물을 받고, 세안 비누와 스킨케어 제품까지 차례로 건네줬다. “오늘 나 별로 할 일 없어. 하루 종일 너랑 있을 수 있어.” 남민우는 뒤에서 그녀를 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김 교수님 화실에 가야 한다고 했지? 나도 같이 갈게.” 여수민은 수어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오빠 바쁘잖아요.] “나 근처 카페에 앉아서 논문 쓰면서 기다리면 돼.” 남민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수민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얼른 나와. 아침 다 식겠다.” 남민우는 그녀의 볼에 한 번 더 몰래 입을 맞추고 문밖으로 나갔다. 여수민은 찬물을 한 움큼 떠 얼굴에 끼얹었다. 거울 속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예쁜 얼굴이 비쳤다. 물방울이 맺힌 얼굴은 이른 아침의 꽃잎처럼 맑고 고왔다. 원래 타고난 바탕이 좋아 피부는 눌렀다 떼면 물방울이 맺힐 것처럼 탱탱했다. 여기에 조용하고 연약한 화가 특유의 분위기까지 더해지니, 친척이든 친구든 모두 그녀를 예쁘다고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늘 네 글자가 숨어 있었다. 안타까움. 벙어리인 게 안타까웠다. 여수민이 마음을 추스르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남민우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곧 가겠다는 뜻을 보였다. 여수민은 직감했다. 또 그 여자일 거라고. 역시나 남민우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교수님이 데이터 하나를 좀 고쳐야 된다고 해서, 학교에 한 번 들렀다 와야 할 것 같아.” 여수민은 말없이 글자를 쳤다. [오빠가 없으면, 그 여자는 실험도 못 해요?] 남민우는 반쯤 쪼그려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질투하는 거야? 내가 언제 걔 데이터라고 했어? 바보야, 내 데이터야.” 여수민은 입술을 꾹 다물고 SNS를 열어 그 사진을 그에게 보여 줬다. 남민우는 툭 낮게 웃었다. “아, 이거 때문에 삐진 거야? 어제 다른 동기들도 다 올리길래 나도 그냥 끼어든 거야. 네가 싫으면 다시는 안 올리면 되잖아, 됐지?” 그는 탁자 위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어 바로 그 글을 삭제해 버렸다. “우리 사이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아. 우리가 실험 도와주는 것도, 교수님 앞에서 점수 좀 따 보려는 거고. 그 공주님을 괜히 기분 나쁘게 할 수는 없잖아. 걔 아빠가 진씨 제약 회사 회장이라던데? 말 한마디면 우리 앞길을 통째로 막을 수도 있대.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적당히 떠받들어 주는 거고, 다른 뜻은 없어. 나 믿어.” 여수민은 남민우가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이 괜히 예민해져 있는 것뿐이라고. 그래서 더 이상 떼를 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다녀오라고 손짓했다. 살고 죽는 진로를 좌지우지하는 지도교수와, 업계에서 말할 권리를 쥐고 있는 윗사람들은 곧 하늘이자, 머리 위에 얹힌 산 같은 존재였다. 여수민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남민우는 그녀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떠났다. 여수민은 대충 밥을 먹고 방 정리를 마친 뒤, 집에서 멀지 않은 케이크 가게로 향했다.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김미숙을 따라 그림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사장이 불러 세웠다. “너는 무슨 낯짝으로 다시 와? 나 네년 때문에 아주 개박살이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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