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너 어제 손님 케이크를 바닥에 내던지고 사람까지 때렸다며? 손님이 나한테 별점 테러에 항의까지 넣었는데, 내 장사가 얼마나 치명타를 입었는지 알기나 해? 지난달이랑 이번 달 월급 안 줘. 그걸로 보상 끝낸 걸로 치고 얼른 꺼져!”
여수민은 시급제로 일하고 있었다. 월급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받는 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글자를 입력해 음성 변환을 켰다.
[사장님, 어제는 사장님이 일부러 저를 시켜 케이크를 배달하게 하신 거예요. 저는 이미 경찰에 신고해서 말해 둔 상태고요. 만약 사장님이 그 사람들이랑 한패라면 소환장 올 때까지 기다리시면 되고, 아니라면 제 월급을 정산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사장님을 위해 증언해 줄게요.]
사장은 잠깐 놀라더니 성질을 부리며 소리를 질렀다.
“누가 그놈들이랑 한패라는 거야! 여수민, 함부로 지껄이지 마. 벙어리가 말 배웠다고 이제 남을 모함하냐? 내가 괜히 불쌍해서 알바시켜 줬더니. 밖에 나가서 물어봐라, 이 근처에서 어느 가게가 벙어리를 받나...”
여수민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사장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 때까지 말이다.
어제 누군가가 정말로 전화해서 꼭 여수민이 배달을 나가야 한다고 콕 집어 말했고, 거기에 돈도 꽤 더 얹어 준 건 사실이었다. 다만 사장은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을 뿐이다.
여수민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니, 심지어 자기를 한패라고까지 말했다.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괜히 일을 키우는 것보다 모른 척 넘어가는 게 낫다. 사장은 짜증 섞인 얼굴로 계산대로 가 현금을 몇 장 집어 들었다.
“진짜 재수 없게도 너를 받아서 이런 꼴이 났네. 월급 줄 테니까 경찰한테 이 일은 나랑 상관없다고 꼭 얘기해라.”
여수민은 돈을 세어 봤다. 두 달 치 합해서 80만, 금액은 맞았다. 그녀는 사장이 무슨 말을 더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가게를 나왔다.
일자리를 하나 잃기는 했지만, 크게 아까울 일은 아니었다. 여수민은 말 그대로 시간 관리의 달인이었다. 하루에 네댓 시간만 자고, 수업과 식사, 수면 시간, 그리고 화실에서 그림 그리는 시간을 빼고도, 온갖 아르바이트를 죄다 끼워 넣었다.
인터넷에서 소형 그림 주문을 받는 것이 하나, 케이크 가게 알바가 또 하나, 나머지 시간에는 중고 태블릿을 하나 장만해, 지금 가장 잘나가는 미디어 플랫폼을 활용해 그림을 그려 상점에 저작권을 주고 있었다.
그 그림들은 천, 십자수, 침구, 식기나 도자기, 휴대폰 케이스, 심지어 굿즈로까지 쓰였다. 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라이선스를 줄 수 있었고, 조금 비싼 개인 맞춤 주문도 받을 수 있었다.
여수민은 이 업계에 비교적 일찍 발을 들였다. 팬층과 거래처도 어느 정도 쌓아 둔 터라, 쌓이고 쌓이다 보니 잘 되는 달에는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수입이 들어왔다.
남민우는 항상 그녀를 음식 저장하는 다람쥐라고 놀렸다. 있는 시간 없는 시간 전부를 돈 버는 데 쓴다고.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미술을 공부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들고, 여수민은 양부모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더 얹고 싶지 않다는 것을.
게다가 그녀는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했고, 목 치료를 위한 돈도 모아야 했다.
만약 국내에서 목소리를 되찾는 수술을 할 수 없다면, 여수민은 해외에 가서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실어증 환자들은 언젠가 다시 말할 수 있기를 꿈꿨으니까.
여수민은 집에 돌아가 자신의 화구 가방을 챙기고, 따릉이를 하나 스캔해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서성구에 위치한 김미숙의 개인 화실로 향했다.
대문과 마당이 딸린 작은 양옥집으로 분위기는 고즈넉하고 우아했다. 1층은 전시 공간이었고, 전부 김미숙과 그녀 본인이 소장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여수민이 처음 오는 건 아니었지만 올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눈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몇 점은 거장급 작품 같았고, 아마도 김미숙이 경매에서 사들인 것 같았다.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미술생으로서 여수민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자존심이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몰래 다짐했다. 꼭 김미숙을 따라 그림을 다듬고 또 다듬어서, 언젠가 자신의 그림도 이곳에 걸리게 만들겠다고.
더 나아가, 미술관, 갤러리, 각종 전시회에 이름을 올리고, 경매에 나가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작품을 들고 세계 투어 전시를 다니겠다고.
여수민은 조용히 그런 꿈을 꾸다가 설렘이 조금 가라앉자 다시 현실로 돌아와 2층으로 향했다.
아직 김미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먼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미숙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됐어, 네 오빠가 너한테 화 안 낼 거야. 내가 보증할게.”
“엄마가 제일 좋아요. 진짜 상상도 못 했어요. 내 주변 친구가 오빠한테 손을 쓸 줄은. 그 약이 몸에 부작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나 진짜 양심에 찔려 죽겠어요. 어젯밤도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
김미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친구 사귈 때 좀 조심해. 어떤 애들은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위로 기어오르려고 해. 네가 단순하고 착해 보이니까, 네 손을 빌려서 높은 데로 올라가려는 거지. 그런 소문 나가면 네 평판도 안 좋아져, 알겠어?”
“알겠어요.”
“어젯밤 준혁이 눈치 빠르게 굴어서 제때 사람들 다 내보내고, 재헌이 불러 주사까지 맞혀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그런 마음가짐부터 글러 먹은 여자애한테 진짜로 당했을 거야.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힌다니까.”
김미숙은 뒤늦게 식은땀 나는 듯 말했다.
여수민은 계단참으로 살짝 물러났지만, 그래도 몇 마디는 들려왔다. 그녀가 망설이며 서 있는 사이 뒤에서 누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낮게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엿듣는 게 좋아요?”
여수민은 깜짝 놀라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의 등 뒤 화구 가방끈을 잡아당겨 살짝 끌어 올렸고, 여수민은 다시 제자리로 섰다.
뒤돌아보니 어젯밤 룸 안에 있던 그 남자였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 비슷한 표시를 했다.
하준혁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뭐 해요?”
여수민은 글자를 쳐서 그에게 설명했다.
[저는 김미숙 교수님의 학생이에요.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니고, 죄송해요.]
하준혁은 비웃는 듯 말끝을 살짝 올렸다.
“그래요? 저는 또 엿듣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네요.”
말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었고, 그 의미를 아는 건 그와 그녀 단 둘뿐이었다.
여수민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은 물감을 칠한 것처럼 새빨개졌다. 하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 순결을 당신 귀가 훔쳐 갔으니까,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이걸 뭘 어떻게 처리하라는 거지?’
여수민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막 글자를 쳐서 물어보려는 순간 김미숙이 복도 건너편에서 이름을 불렀다.
“준혁이니?”
“네.”
하준혁은 귀찮은 듯 한마디 대답했다.
그때 한 여자애가 뛰어나왔다. 얼굴에는 달콤한 미소가 떠 있었고, 갈색 웨이브 머리에 상의는 아이보리색 원숄더 블라우스, 하의는 같은 색 계열의 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얌전하면서도 귀티 나는 차림이었다.
다만 계단 위에 서 있는 둘을 보자, 얼굴에 띤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빠, 이분은...?”
심성은은 다시 미소를 추스르고 다가와 자연스럽게 하준혁의 팔을 껴안았다.
하준혁은 휴대폰을 꺼내는 척하며 몸을 살짝 틀어 앞에 멍하니 서 있던 ‘멍청한 고양이’ 같은 애를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갔다.
“네 엄마 제자.”
심성은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여수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눈에 잠깐 적대적인 기색이 스쳤다가 곧 차갑게 말했다.
“같이 올라와요. 우리 엄마가 기다리고 있어요.”
여수민은 서둘러 그들을 따라 올라갔다. 앞에 있는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알고 보니 서로를 오빠, 동생이라고 부르는 사이였다. 다만 김미숙의 아들은 꽤 차가워 보였고, 김미숙과는 정반대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김미숙이 직접 나와 맞이하며 다정하게 여수민의 손을 잡았다.
“우리 막내 제자가 왔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