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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심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줘 쥐어짜듯 말했다. “그 약이 어쨌는데?” 이수연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아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나 진짜 유치장 가서 전과 남기는 건 싫어서 그래.” 이번에는 괜히 하씨 가문의 큰아들을 건드린 터라, 이수연은 정말로 겁이 났다. 심성은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가기는 싫거든?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내가 안 무서울 것 같아? 나도 하준혁 눈빛 존나 무서워. 됐고... 그만 울어. 다시 방법 좀 생각해 볼게. 근데 이수연, 나도 경고하는데 입 단단히 닫고 있어. 너희 집 장사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 우리 아빠 한마디면 끝나는 거 알지?” 이수연은 당연히 함부로 나설 생각이 없었다. 심성은의 아버지는 연경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었고, 심씨 가문은 군이나 정계 쪽 출신이라 뒤가 든든한 집안이었다. 지금 심성은의 오빠 심승욱도 정계에 발을 들였다. 게다가 심성은의 엄마는 아주 유명한 화가였다. 반면 이수연의 아버지는 문구류 장사로 돈을 번 졸부일 뿐이라, 이런 집안과는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심성은은 전화를 끊고 시퍼렇게 굳은 얼굴로 방향을 틀어 차를 돌렸다. 부모나 오빠를 찾아가는 대신 평범한 주택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위층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멀찍이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가고 있어, 누구야?” 문이 열리자마자, 심성은은 바로 안길 듯이 몸을 들이밀며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 나 좀 도와줘...” ... 여수민은 오전 내내 그림을 그렸다. 손목이 욱신거릴 정도로 아팠다. 그녀는 팔뚝을 쥐고 한 번 돌려 보더니, 일어나서 배달 음식을 시킬까 생각했다. 앱을 한 바퀴 훑어봤지만 쿠폰이 있어도 그렇게 싸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근처를 한 바퀴 돌면서 길거리 음식 아무거나 사 먹기로 했다. 막 화실을 나서다가, 김미숙과 그 아들이 아직 안 간 것을 발견했다. 둘은 김미숙의 개인 사무실 안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여수민은 잠깐 망설였다. 그래도 문을 두드리고 휴대폰에 글을 쳐서 화면을 보여 주었다. [교수님, 저 밥 사 오려고요. 뭐 사다 드릴까요?] 김미숙은 그 말을 계기로 자리에서 일어나, 오전 내내 옆에서 빈둥거리며 신경만 긁어 놓은 아들을 한 번 흘겨봤다. “가자, 마침 밥 먹을 시간이네. 수민아, 너도 같이 가. 쟤가 사게 해.” 여수민은 어떻게 같이 가느냐고 망설였지만, 거절하는 말을 치기도 전에 김미숙이 다가와 팔을 두르고 밖으로 이끌었다. “됐어, 내가 밥 사 주는 건데 뭘 그렇게 머뭇거려.” 교수님이 자신을 너무 잘 챙겨 준다는 생각에, 여수민은 괜히 뭉클해졌다. 집에 돌아가면 직접 만든 디저트를 선물로 가져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셋이 함께 화실을 나섰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김미숙의 개인 화실은 오래된 골목길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근처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공방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중 한 카페 앞을 지나가는데, 통유리 안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더니 허둥지둥 물건을 챙겨 들고 쫓아 나왔다. “수민아!” 여수민은 의아해서 고개를 돌렸다. 남민우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금세 미소가 번졌다. 남민우는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미숙 교수님. 저는 수민이 남자친구 남민우라고 합니다.” 예전에도 몇 번 화실 앞까지 데리러 온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지, 이렇게 직접 인사를 건넨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 남자... 남민우는 티 나지 않게 김미숙 옆에 선 남자를 곁눈질했다. 기품 있어 보이는 분위기에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여수민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무턱대고 인사 건네지는 않고 그냥 옆에 서서 미소만 지었다. 김미숙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수민이는 남자친구가 있었구나. 어디 학교 다니니? 아니면 벌써 일해? 전공은 뭐고?” 키도 꽤 크고 인상은 온화하고 단정했다. 말투도 공손했고, 눈빛 역시 정직하고 맑았다. 남민우의 첫인상은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김미숙이 이런저런 것을 묻는 것은 다 여수민이 놓인 사정 때문이다. 언어장애가 있는 예쁜 여자아이.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조건이 좋아 보이는 남자와 사귀고 있다면, 도무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혹시 여수민과 잠깐 놀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말이다. 남민우는 주눅 들지도, 과하게 까불지도 않게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교수님, 저랑 수민이는 어릴 때부터 옆집 살던 사이예요. 저는 연경대 생물과학과고요. 학부랑 석사 다 연경이고, 지금은 문종석 교수님 밑에서 석사 2년 차입니다.” 김미숙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연경대는 최상위권 명문이고, 그중에서도 생물과학과는 점수가 특히 높다. 이렇게 우수한 남학생이 여수민과는 청춘을 함께 보낸 소꿉친구였다. 자기 제자의 짝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김미숙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럼 같이 밥 먹을래? 여기까지 왔는데.” 여수민은 남자친구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어색해서 손바닥으로 남민우의 손을 살살 쓸어내렸다. 남민우는 짧게 웃었다. “교수님, 번거롭게 해 드리기는 싫어서요. 제가 직접 밥 준비해 왔어요.” 그제야 김미숙은 그가 손에 보온 도시락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꽤 가정적인 스타일의 남학생이었다. 더는 붙잡지 않고, 김미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하준혁이 뒤를 따라가며, 둘이 맞잡은 손을 슬쩍 바라보았다. 여수민은 그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남민우 품으로 쏙 파고들어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만 봐도, 지금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드러났다. 남민우는 이제야 방금 지나간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내려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카톡 보냈는데 왜 답 안 했어?” 여수민은 못 봤다는 뜻으로 수어를 보였다. 그의 손을 끌어 길을 건너 맞은편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창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펼쳤다.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남민우가 물었다. [김 교수님 아들이야.] “아하.” 남민우는 짧게 대답한 뒤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옥수수 갈비탕이 담긴 통을 그녀 쪽으로 밀어주고, 나머지 토마토 계란 볶음과 감자볶음을 탁자 위에 차려 놓았다. “먹어. 다 네가 좋아하는 것만 했어.” 길 건너 식당 2층. 창가 자리에서 김미숙과 하준혁이 마주 앉아 있었다. 마침 편의점 창문도 보이는 자리라, 길 반대편에서 나란히 붙어 앉아 밥을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들어왔다. 하준혁은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인 채 굳은 얼굴로 그쪽을 보고 있었다. 김미숙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봐라, 여수민은 스무 살에 벌써 연애도 하네. 너는 서른 줄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혼자야. 안 창피해?” 하준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남민우가 고개를 숙여 여수민의 입술에 입 맞추던 장면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눈에 거슬렸다. 초여름 땡볕보다도 더 보기 싫었다. “저렇게 알콩달콩한 거 좀 봐. 연애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하지도 않아.” 김미숙은 혼자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수민이랑 성은이도 동갑이지. 저 나이 때가 딱 제일 좋을 때야. 저럴 때 연애 한 번 하는 것 가지고 누가 뭐라 그러니. 나는 너더러 당장 결혼하라고도 안 하잖아. 애가 너무 어린 건 싫으면, 또래여도 괜찮고. 중요한 건 네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말을 좀 해 줘야 내가 소개라도 하지...” 하준혁은 고개를 돌려 아래로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찻잔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어머니가 맘에 들어 하는 사람으로 알아봐 주세요. 저는 다 괜찮아요.” 김미숙은 숨이 턱 막혔다. “결혼하는 건 내가 아니고, 네가 아내를 데려오는 거야. 중요한 건 결국 네가 좋아해야지.” “제가 좋아하면 되는 거죠?” 하준혁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김미숙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우리는 남들처럼 정략결혼 요구하는 집 아니야. 여자 쪽 집안이야 꺾을 데 없이 깨끗하고, 스스로도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으면 됐지. 네 아빠도,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도, 괜히 끼어들 생각 안 하실 거다.” 솔직히 말해서 하준혁은 눈이 아주 높았다. 주위 동갑내기 남자애들 대부분은 벌써 여자친구를 몇 번씩 바꿨는데, 하준혁은 줄곧 혼자였다. 하루 종일 싸늘한 얼굴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김미숙이 걱정하는 건 괜찮은 여자를 못 알아볼까 봐가 아니라, 아예 누구 하나 잡을 생각을 안 할까 봐였다. 하준혁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제가 알아서 찾을게요. 어머니는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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