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강청서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김… 아가씨라고? 이현익의… 왕비?’
전생에서 경성에서는 김연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잔병이 많았던 그녀가 경성의 교외에서 16년을 살다가 경성으로 돌아오자,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누를 만들 줄 알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목탄필과 기적이라 불리는 활자 인쇄술까지 발명해서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그녀를 천재라 칭송했다.
사내였더라면 후작이나 재상이 되었겠으나 여인이라고 해서 뛰어난 재능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궁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황자들이나 충신들과 담소를 나눌 정도이니 그녀는 하늘의 구름이고 강청서는 땅속의 진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둘이 유일한 만남은 이경원 때문이었다.
그날 이현익이 왕부의 뒤채에서 손님을 맞이하며 시끌벅적해지고 있었을 때 이경원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몰래 담벼락에 매달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손에 힘이 풀려 갑자기 떨어질 뻔할 때 김연희가 그를 잡아주었다.
그런 다음 김연희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라 말하며 이경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위대한 말은 강청서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이경원은 돌아온 후 수없이 그날의 장면을 떠올리며 말했다.
[어머니, 그거 아십니까? 선녀의 몸에서 정말로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분의 눈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밝았습니다. 선녀 누님도 제 어머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녀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침묵하며 초를 잘라 등불을 밝히고, 구멍 난 이경원의 바지를 꿰맬 뿐이었다.
…
“오라버니…”
자신이 후작부 서녀와 엮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강청서는 강희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은자도 받았으니 다른 데로 이사 가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러자 강희천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꾸나. 우리 남매가 이리 큰 경성에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말은 이렇게 해도 머물 곳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향시가 가까워진 탓에 전국의 거사들이 번화하고 인파가 북적이는 경성으로 모여들어서 객잔에는 사람들이 이미 꽉 찬 상태였다.
밤이 깊어지며 야간 통금이 다가오자, 관차가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이들 남매는 어쩔 수 없이 누추한 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으나 강청서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왕부에 있을 땐 날마다 조마조마하게 살아야 했다.
만약 자칫 잘못하여 다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다음 날에는 이경원까지 굶어야 했다.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라버니와 함께 있게 되었으니, 세상에서 이보다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다만… 원이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 아마 이 무능한 어미 곁을 떠난 원이가 다른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강청서는 볏짚 위에 요를 정성스레 편 후, 오라버니가 책을 볼 수 있도록 등잔불을 밝혀주었다.
서늘하고 고요한 밤바람 속에서 강희천은 책장을 넘기며 옛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누추한 절에서 잔 것이 10년 전이었지. 기억나느냐? 그때 네가 한 상단을 구해 옥패를 받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잠잘 때도 꼭 쥐고 있었잖아.”
짐을 정리하던 강청서의 손이 멈췄다.
“오라버니, 그 옥패가 절에서 주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10년 전, 그녀는 뒤통수를 다치는 큰 사고를 당해 많은 기억을 잃었던지라 어린 시절 이야기는 모두 오라버니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옥패가 이현익이 찾는 옥패란 것을 알았어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은 도둑으로 오해받아 목숨을 잃을지 두려워서였다.
책을 뒤지던 강희천의 손가락이 대학이라 쓰여 있던 장에서 오랫동안 멈춰있었다.
강희천은 눈살을 찌푸린 채 억울함을 꾹 참고 있는 듯했다.
“오라비가 잘못 기억한 것 같구나. 그 옥패는… 절에서 주운 것이 맞아. 요즘 경사만 읽으며 달포 후에 있을 향시 생각만 하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나 보다. 아, 맞다. 평소에 항상 지니고 다니던 옥패는 요즘에 왜 안 보이느냐?”
강청서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대군마마께서… 가져가셨습니다.”
“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들고 있던 책을 땅에 떨어뜨린 강희천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가장 아끼던 책이었건만 이 순간만큼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가… 뭐라고 말하든?”
강청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어젯밤에… 무심코 가져가셨습니다. 어디서 구한 것이냐고 묻길래 절에서 주웠다고 했습니다.”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강희천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는 그를 멀리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