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에취!”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서하영의 입에서 돌연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흘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괜찮아요?”
저토록 고운 얼굴에 물에 흠뻑 젖은 모습이라니. 무슨 큰일을 겪은 게 분명하다.
서하영은 다리 사이로 스며드는 고통을 꾹 참으며 애써 밝은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기사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학생이죠? 혼자 바깥에 나왔을 땐 늘 조심해야 해요.”
“네,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녀는 짧게 대답하고 곧장 휴대폰을 꺼내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즉시 오늘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브린드 호텔에서 찍힌 내 모든 CCTV 영상 기록 삭제해. 절대 흔적 남기면 안 돼.]
답장은 간단했다.
[OK!]
상대방은 아무런 질문도, 의심도 없이 곧바로 명령에 따랐다.
방금 전까지 울려 퍼지던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뇌리를 파고들자 서하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삼켰다.
불과 몇 시간 전.
서하영은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저녁 7시에 맞춰 브린드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사업 번영을 위해, 결혼한 지 3년이 다 되어감에도 얼굴조차 보지 못한 남편을 직접 찾아가라고 강요했다.
3년 전, 서진 그룹은 자금난으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다. 어마어마한 채무로 인해 아버지는 징역 20년을 살아야 했다.
궁지에 몰린 아버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임씨 가문을 찾아가 오래전 있었던 혼담을 들이밀었다.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가정을 꾸린 상태였기에, 정략결혼은 자연스럽게 차남인 임도윤에게 돌아갔다. 이에 그가 불만을 품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임씨 가문 또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600억이라는 거액을 내놓으며 서씨 가문이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동시에 그에 따른 조건도 내걸었다. 3년 뒤면 이 혼약은 자동으로 해제된다는 내용이었다.
서하영은 씁쓸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대체 어떻게 자신을 소개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전... 당신의 와이프예요.”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서하영은 아버지가 알려준 방 번호대로 연풍관 3층에 올라갔다.
스위트룸 앞, 그녀는 긴장되는 마음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문은 잠금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서하영의 손끝이 닿자 바로 스르륵 열려버렸다.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설마 임도윤이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노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문을 밀고 안으로 두 걸음 걸어갔다. 현관에만 희미한 조명이 켜져 있었고 거실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건가?’
불길한 느낌에 돌아나가려는 순간, 돌연 침실 쪽에서 물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잔뜩 날이 선 경계심은 그녀에게 망설임 없이 돌아서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둠 속에서 3초쯤 서 있다가 결국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임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녀가 침실 문을 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불현듯 강한 팔이 뻗쳐 나와 그녀를 세차게 욕실로 잡아끌었다. 남자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고는 서늘하고도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약을 타? 죽고 싶어?”
거실엔 창밖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들었지만 욕실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서하영은 반격하지 않고 목이 조여드는 통증을 견디며 힘겹게 말했다.
“저 아니에요!”
“그럼 넌 누구지?”
남자의 몸은 장시간 찬물에 젖어 있었는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입술 사이로 내뿜는 숨결은 불길처럼 뜨거웠다. 냉기와 열기가 교차하는 그 감각에 서하영은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남자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러다 참을성이 극에 달한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렇게 차갑고도 강압적인 입맞춤이 쏟아졌다.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들어 남자의 몸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힘과 속도는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긴 다리로 그녀의 무릎을 제압하며, 그의 거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와줘.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끝나고 나서 다 보상해주지.”
서하영의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다. 이런 상황이 펼쳐질 거라는 건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임도윤이 함정에 빠진 건가?’
어둠 속에서 남자의 숨결은 이미 그녀의 모든 감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도와야 할지 아니면 다른 여자를 찾아보라고 해야 할지 머뭇거리던 찰나, 무자비한 남자의 키스가 폭풍처럼 쏟아졌다.
...
그녀는 언제 욕실에서 나와 침대에 누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가 여전히 거부와 순응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을 때,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깊숙한 곳으로 끌어내렸다.
결혼 후 언젠가 있을 거라 상상했던 장면이긴 했다. 하지만 결코 지금처럼은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 그녀에겐 3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관계가 끝날 무렵, 마침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의 발걸음은 침실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임 대표님?”
“들어오지 마.”
남자의 낮은 음성은 진득한 여운과 함께 무심하게 떨어졌다.
곧이어 바깥에선 정적이 이어졌다.
얼마 후, 임도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는 침대 위 여자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거실로 걸어 나갔다.
서하영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며 몸을 웅크렸다. 불이 켜지자 희미한 빛이 침실 틈새로 스며들었다.
임도윤은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이목구비 뚜렷한 그 준수한 얼굴엔 조금의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비서가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열었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임도윤은 술자리에서 갑자기 혼자 자리를 뜬 뒤로 두 시간 동안이나 소식이 끊겼다. 하여 걱정이 되어 이곳에 와 보았는데 조금 전 무언가 들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 같았는데?
임도윤은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별일 아니야.”
비서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진철 회장이 청설각 1009호에서 9시에 뵙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임도윤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느 서진철?”
순간 기억이 떠오른 그는 차갑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3년 다 지났나?”
“아직 몇 달 남았습니다.”
그의 눈매가 비꼬듯 휘어졌다.
“그게 그거지 뭐.”
비서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서진철 씨는 이미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뭔가 부탁할 게 있는 듯합니다.”
조금 전 침실의 여자가 떠오른 그는 설명하기 힘든 불쾌함에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딸을 한 번 팔아넘긴 것도 모자라 또 팔아먹을 생각인 거야? 뻔뻔하기는. 내가 계속 받아줄 거라 생각하나? 아니면 그 딸이 매번 큰 값에 팔릴 정도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거야? 안 만나!”
그리고는 무정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침실 안. 서하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홍조로 물들어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식어갔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서진철의 딸임을 알았다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팔아넘겼다’라는 단어는 더욱 모욕적이고 잔혹했을 것이다.
서하영은 이를 악물고 온몸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애써 참아내며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 작은 물건을 꺼내 탁자에 꾹 눌러두었다.
이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발코니로 향한 뒤 창문을 열고 단숨에 몸을 던졌다.
소녀의 가녀린 그림자는 허공에서 몇 번 휘돌다 곧장 멀찍한 돌길 위에 내려앉았다가 바로 노란 가로등 불빛 속으로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임도윤은 바깥에서 한참 더 비서와 대화를 나눈 뒤 명령을 내렸다.
“오늘 술자리에서 손을 함부로 놀린 놈이 누군지 확인해.”
조금 전 소리를 떠올린 비서는 곧바로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임도윤은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희미한 불빛 속 어지럽혀진 침대를 훑어보더니 무심히 말했다.
“일어나. 돈 줄 테니까 이번 일은 없던 거로 하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스위치를 눌렀다. 침대 위에는 혼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곧장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방금 전 나와 함께 뒹굴었던 여자는 귀신이었나?’
그러나 분명... 그의 시선이 침대 위 붉게 스민 핏자국에 머물렀다.
임도윤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어 그의 시선이 침대 옆 탁자 쪽으로 옮겨갔다. 천천히 걸어가 꽃병 아래 눌린 물건을 집어 든 순간, 그의 얼굴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