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그의 손에는 젖은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돈을 두고 가? 이 여자가 날 뭐로 보는 거야?’
임도윤의 얼굴은 서늘하게 굳어졌다. 성큼성큼 발코니로 걸어가 보니 역시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곳은 층간 거리가 멀어 3층이라도 일반 건물의 4층 높이에 해당한다.
‘대체 어떻게 뛰어내린 거지?’
‘내가 그렇게 무서웠나? 목숨까지 걸고 도망칠 만큼?’
창밖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피부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 번진 불길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그 여자는 돈 한 장으로 그를 모욕했을 뿐 아니라 몰래 도망치기까지 했다.
‘다신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서하영은 운해로에서 택시에서 하차했다. 뒷좌석을 어지럽게 적셔버린 탓에 차비를 두 배로 더 치렀다.
집에 도착했을 때, 가정부 오진숙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조금 일이 있었어요. 먼저 올라가 씻을게요.”
서하영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제가 욕조에 물 받아 놓을게요.”
오진숙은 더는 묻지 않고 부랴부랴 뒤따라 올라갔다.
몇 분 뒤, 따뜻한 욕조 속에 몸을 담그니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근육들이 서서히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싶어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었다.
샤워를 마치고 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오진숙의 도움을 받아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을 때, 서진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서하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녀는 서진숙을 내보낸 뒤 발코니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통화가 연결되기 바쁘게 다급한 서진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영아, 지금 어디야? 임 대표 만났어?”
서하영의 목소리는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저와 임 대표의 관계가 걱정돼 일부러 약까지 쓰신 거예요?”
서진철은 화들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약이라니? 누가 약을 탔다는 거냐? 난 그런 짓 하지 않았어!”
“하지 않으셨다고요?”
서하영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다면 왜 임 대표 비서와는 아홉 시에 약속을 잡아 놓고 제게는 일곱 시라고 하신 거죠?”
전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서하영이 실망스러운 마음에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영아! 그건 아버지가 잘못했다. 널 조금이라도 일찍 임 대표와 만나게 하려고 그랬어. 그러면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여... 그래야 임 대표도 마음을 조금 열지 않겠니.”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니? 왜 그래?”
그가 어느 정도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낀 서하영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정말 아버지가 아니에요?”
서진철은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무리 궁지에 몰렸어도 내 딸을 함정에 빠뜨리는 더러운 수는 쓰지 않는다!”
서하영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영아,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요. 임도윤은 만나지도 못했어요.”
서진철은 더 캐묻지 못하고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어찌 됐든 아버지가 미안하다. 다시는 널 강제로 그 사람 만나게 하지 않으마. 네가 반산 별장에서 살기 싫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데리러 가마.”
서하영의 격앙되었던 목소리는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이미 2년 넘게 살았는데 몇 달 더 버티는 게 뭐가 문제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여기 좋아요.”
그 별장은 임도윤의 개인 재산에 속했다. 그녀는 혼인신고를 하자마자 이곳에 옮겨왔고, 그렇게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서진철은 안도하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몇 개월이 지나고 3년이 되는 날, 내가 직접 데리러 가마. 참...”
서진철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이번 주 토요일 네 엄마 생일이니까 꼭 집에 와라. 지난번 엄마가 너한테 했던 말은 진심이 아니니까 마음에 두지 말고. 엄마도 후회하고 있어. 단지 체면 때문에 사과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토요일 오전엔 수업이 있어요. 끝나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아버지한테 연락해라.”
전화를 끊은 뒤, 서하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아야, 이번 봄 신상 목걸이랑 귀걸이 세트 준비해 줘. 며칠 안에 가지러 갈게.”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니 저도 모르게 어둠 속의 기억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녀는 두 팔로 난간을 끌어안고는 얼굴을 묻어버렸다. 분노인지 증오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옥죄었다.
밤 11시, 임도윤은 브린드 호텔을 나섰다. 비서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대표님, 조사 끝났습니다. 블루 컴퍼니 부사장, 이승우였습니다. 본래 자신이 데려온 여자에게 쓰려던 약인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술잔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승우는 지금 겁에 질려 강진시를 떠나 해솔시로 도주한 상태입니다.”
임도윤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이왕 도망친 거...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
비서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온 임도윤은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발코니 벤치에 앉아 담뱃갑을 만졌다.
달빛 아래, 그의 손끝에서 피워낸 담뱃불이 희미하게 번졌다.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스르륵 흘러내렸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준수한 옆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한 조각 같았다.
그러다 문득 오늘 밤의 그 여자가 떠올랐다. 사실 그는 욕실에서부터 그녀의 불안함과 떨림을 느꼈었다. 하여 너무 급하게 행동하면 그녀가 다칠까 봐 조심스럽게 입맞춤만 오래 이어갔던 것이다.
그녀가 비로소 숨을 내쉬며 반응한 뒤에야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녀가 팔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시 그의 의식은 완전히 붕괴한 상태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녀가 정말 이름을 불렀던가? 아니면... 환청이었나?
임도윤은 그녀가 놓고 간 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5만 원짜리 지폐를 집어 들었다.
요즘 세상에 현금을 들고 다니는 여자가 있다고?
‘그 여자는 도대체 왜 내 방에 나타났던 걸까? 대체 누구지?’
순간 떠오른 호기심에 임도윤은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 3층에서 뛰어내린 여자 찾아내.”
“알겠습니다.”
비서 명지훈은 명령에 답만 할 뿐 종래로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교에서 나오고 있을 때, 서하영은 지도교수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서하영, 내가 정리하라고 했던 장학금 신청 자료 지금 내 방으로 가져와.]
그녀가 자료를 정리하고 있을 때 지도교수가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
[급한 회의가 잡혀서 9층 회의실로 가는 중이야. 너도 그쪽으로 와.]
서하영은 짧게 답장한 뒤 행정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검은색 벤틀리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하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차가 떠나고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공교롭게도 코너를 돌자마자 전화를 받고 있는 그와 마주치고 말았다. 서하영은 황급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 고개를 숙였다.
얼마 후 머리를 들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깊은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저 사람이 대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임도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늦추며 엘리베이터가 닫히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순간,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서하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임도윤의 날카롭고 의심 어린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