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순간 서하영은 자리에 얼어붙었다.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왜 자꾸 뒤따라오는 거죠? 이 학교 학생이에요?”
사실 그는 일찌감치 여학생 한 명이 따라오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면 그녀도 핑계를 대며 멈췄고, 그렇게 급기야 여기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
서하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고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 누구든 걸을 수 있는 길인데, 왜 그쪽을 따라왔다고 단정하시는 거죠?”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살짝 냉기가 번졌다. 그는 무심히 한 걸음 물러서며 그녀에게 엘리베이터에 오르라는 뜻을 표했다.
서하영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됐습니다. 또 오해라도 하실까 봐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홱 돌아서 계단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또다시 임도윤과 마주칠까 두려워 아예 계단을 타고 9층까지 올라갔다.
그녀가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지도교수는 경영대 학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하영을 발견하자 그녀는 잠깐 기다리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옆엔 다른 몇 명의 학생들도 자료를 내기 위해 와 있었다. 그중 한 여학생의 음산한 눈빛이 느껴졌다. 분명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는 시선이었다.
서하영은 개의치 않고 휴대폰을 꺼내 스도쿠를 풀며 시간을 때웠다.
5분쯤 지났을 때,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국한 지 꽤 되셨네요? 해외에 그토록 오랫동안 계셨으니 이제 복귀할 때도 됐죠.”
두 사람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 명은 교장, 그리고 그 옆의 인물은...
서하영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임도윤 역시 그녀를 발견했다. 그의 날카롭고 긴 눈매는 단 1초도 머무르지 않고 스치듯 지나갔다.
학장은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교장에게 인사했다.
교장이 그에게 임도윤을 소개했다.
“이분은 임성 그룹의 대표이자 우리 학교 졸업생이기도 해요. 또한 지금 학교에서 운영되는 많은 장학금의 지원자가 바로 임 대표님이에요.”
학장은 순식간에 공손해진 태도로 웃음을 지으며 임도윤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늘이 마침 학생들이 장학금 신청서를 제출하는 날입니다. 보십시오, 저 학생들이 바로 대표님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입니다.”
임도윤의 시선이 학생들을 가볍게 훑고 지나가다 서하영에게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강진대는 언제나 인재가 끊이지 않는군요.”
서하영은 남자의 준수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방탕한 재벌 2세라 했다. 어젯밤 그가 보였던 거침없고 공격적인 모습은 분명 그랬다. 반면, 지금 이 순간 남자는 고귀하고 온화한 기품을 풍기고 있다.
‘대체 어떤 얼굴이 저 사람의 진짜 모습인 거지?’
그때, 학장이 돌연 몇몇 학생을 지목했다. 학생들은 긴장한 듯 등을 곧추세우고 존경스러움과 수줍음이 섞인 눈빛으로 임도윤을 바라보았다.
그중 아까부터 서하영을 노려보던 여학생이 도르륵 눈을 굴리더니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학금을 후원해주신 임 대표님께서 오셨으니,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교장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돼.”
주민정은 곁눈질로 서하영을 흘끗 쳐다보고 난 뒤 손을 등 뒤로 조용히 모았다.
“임 대표님께서 설립한 장학금은 우수한 학생들을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수함이란 학업 성적뿐 아니라 인성도 포함되는 거 아닐까요?”
“물론이지.”
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정은 휴대폰을 꺼내 포럼에 올라온 글 하나를 화면에 띄워 보였다.
“며칠 전, 누군가 서하영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고급 승용차에 타는 걸 목격했다고 올린 글입니다. 서하영의 집안 조건으론 그런 차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차에 탔을까요? 아마 다들 예상되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학생이 과연 장학금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임도윤을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지도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주민정을 제지했다.
“주민정, 대표님 앞에서 뭐 하는 거야?”
하지만 주민정은 오히려 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대표님께서도 본인이 후원하신 장학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의미 없이 낭비되는 건 아닌지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장이 얼굴을 굳히며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오래전 올라온 글이었는데 흐릿하게 찍힌 몇 장의 사진이 전부였다. 사진 속에서 서하영은 한 중년 남자와 함께 벤츠에 올라타 있었다.
“서하영, 설명해봐.”
주민정이 도발적인 얼굴로 서하영을 노려보았다.
서하영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다만 평소 잔잔하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뭐라고 내가 너한테 해명해야 해?”
주민정이 다시 입을 떼려던 순간, 임도윤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로질렀다.
“요즘 세상에 명문대 학생이 이런 근거 없는 추측으로 남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일도 있네요?”
주민정은 이를 악물고 반박했다.
“사진이 여기 버젓이 있는데 왜 근거가 없어요!”
임도윤이 냉소를 흘렸다.
“그 사진에서 대체 뭘 알 수 있죠? 지금 내가 저 학생을 두둔해주고 있어요. 그렇다면 나랑도 부적절한 사이라고 주장할 생각인가요?”
서하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다행히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때문에 저런 말을 당당히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
임도윤이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
“이게 바로 명문대 우수 학생의 수준인가요?”
그는 우수 학생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줌으로써 주민정이 방금 한 말을 정면으로 비꼬았다.
주민정은 그의 기세에 눌려 말문이 막혀버렸다.
다른 사람들 역시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유독 서하영만이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임도윤이 자신을 위해 나서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교장이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
“임 대표님 말씀이 맞다. 잘 보이지도 않는 흐릿한 사진으로 헛소문을 퍼뜨리다니. 애초에 그런 글이 우리 강진대 포럼에 올라와선 안 됐다.”
지도교수가 말했다.
“제가 곧바로 글을 삭제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주민정은 여전히 억울해하며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교장이 임도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애써 분위기를 수습하려 미소를 지었다.
“장 학장이 회의실에서 할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저희는 제 방으로 가시죠.”
임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 지도교수가 주민정에게 분노하며 소리쳤다.
“주민정,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주민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매서운 눈빛으로 서하영을 노려보다가 문을 박차고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이어 교수는 서하영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서하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비한 자료를 내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러나 복도 모퉁이에서, 독사 같은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주민정과 마주쳤다.
서하영은 시선을 주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스치며 주민정을 지나치던 순간,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선우가 그렇게 좋으면 사귀자고 고백해. 이런 비열한 수법 쓰지 말고.”
그녀의 맑은 얼굴에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형편없어!”
주민정의 얼굴이 순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발악했다.
“너 뭐라고 했어?”
서하영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민정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쫓아가려 하자 함께 있던 친구가 다급히 팔을 잡았다.
“정신 차려, 주민정! 여긴 학교야!”
주민정은 서하영의 뒷모습을 살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두고 봐. 언젠간 끝장내고 말 거야!”
...
오후엔 수업이 없어, 서하영은 버스를 타고 반산 별장으로 돌아갔다. 창가에 기대앉으니 머릿속에 다시금 임도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첫 만남은 인사할 겨를도 없이 침대 위에서 이루어졌었다. 두 번째 만남은 적의를 품은 스토커로, 또 사람들 앞에서 상간녀로 오해를 받으며...
서하영은 이마를 창문에 대고 허탈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남자는 그녀의 천적이 분명하다!
한 시간 후, 임도윤은 교장의 만찬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강진대를 나섰다.
운전기사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대표님, 오후 세 시에 금수만 별장 구역 개발 회의가 예정돼 있습니다. 그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는데 어디로 모실까요?”
임도윤은 손에 쥔 서류를 훑다가 별장이라는 단어에 무언가 생각난 듯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청원 별장으로 가.”
“알겠습니다.”
운전기사는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임도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너머에서 명지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표님, 어젯밤 그 여자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