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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 강지영은 하나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박태형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달 뒤면 네 언니가 돌아와. 이 한 달 동안 계속해서 언니 역할을 제대로 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어머니 임우희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냉랭했다. “모든 게 끝나면 60억 줄게. 그 돈으로 네 인생 살면 돼.” “알겠습니다.” 강지영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파도 한 번 일지 않는 고요한 수면처럼 말이다. 전화를 끊은 강지영은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커다란 웨딩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박태형은 단정한 슈트 차림이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완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값비싼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3년이나 되었네...” 그녀의 손끝이 액자 가장자리를 천천히 훑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3년 전, 박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라는 두 재벌가의 정략결혼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강지영의 쌍둥이 언니인 강지윤이 박씨 집안에서 점찍어 둔 며느리였다. 하지만 강지윤은 결혼식 전날 밤,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빠, 엄마. 전 정략결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게 제 책임이라는 건 알아요. 3년만 자유를 찾을 시간을 주세요. 3년 뒤에 돌아올게요.] 두 집안의 계약이 깨지는 걸 막기 위해 강씨 가문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시골에 내버려두었던 쌍둥이 둘째 딸 강지영을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골에서 자라 집안 모임에도 참석할 자격이 없던 강지영은 강지윤의 이름을 빌려 대리 신부가 되었다. “태형이가 좋아하는 건 네 언니가 아니라, 그 집안이 후원하던 가난한 학생이야.” 결혼식 전날 밤, 임우희는 강지영에게 차갑게 경고했다. “네가 시집가서 편할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넌 그저 조용히 네 언니 신분으로 3년만 버티면 돼.” 그때 강지영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박태형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는 경제지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로 재계에서 가장 명망 높은 귀공자였으며, 또 수많은 명문가 영애들이 선망하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배시우라는 여자가 있었다. 배시우는 박씨 가문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명문대를 다닌 가난한 학생이었다. 박태형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사랑했지만 배시우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축복받지 못할 사랑을 택할 수 없다며 스스로 관계를 끝내고 해외로 떠났다. 박씨 가문에서는 이를 기회라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박태형에게 정략결혼을 제안했다. 박태형의 서재는 배시우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고, 또 그는 매주 거르지 않고 파리로 몰래 날아가 배시우를 만났다. 하지만 강지영은 박태형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안방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어 복도 끝 손님방에서 자야 했다. 강지영은 강지윤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두 집안의 협력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3년 동안 박태형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가 야근하면 현관 등을 밤새 켜 놓고 기다렸고, 위가 안 좋다는 말에 매일 다섯 시에 일어나 위장에 좋은 죽을 끓였다. 그리고 박태형은 조용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강지영은 이 집에서 가장 조용한 존재가 되도록 했다. 점차 재계에서는 박태형의 아내가 남편에게 푹 빠져 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강지영을 바라보는 박태형의 눈빛도 미묘하게 달라지는 듯했다. 서재에서 배시우의 사진들이 사라졌고 매주 가던 파리행도 취소되었다. 박태형은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감기에 걸리면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으며, 심지어 그녀와 부부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강지영은 자칫 이 거짓 결혼에서 진정한 사랑이 싹트고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하지만 세 달 전, 배시우가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게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박태형의 마음은 다시 배시우에게 사로잡히면서 밤새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서재는 또다시 배시우의 사진들로 가득 찼다. 모두가 강지영을 비웃었지만 그녀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을 뿐 화도 원망도 없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박태형을 사랑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의 곁에 남아 있었던 이유는 단지 부모님이 약속한 돈과 자유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강지영과 강지윤이 쌍둥이라 해도 두 사람의 운명은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임우희는 강지영을 낳을 때 심한 출혈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후로 강지영을 보는 임우희의 눈빛에는 언제나 혐오감이 서려 있었고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던 아버지 역시 강지영에게만은 냉정했다. 마치 집안의 불운이 전부 그 아이 탓인 듯이 말이다. 다섯 살이 되던 해, 강지영은 시골에 있는 보모의 집으로 보내졌다. 강지영은 그 겨울을 지금도 잊지 못했다. 보모의 집 난로는 고장이 나 있어 그녀는 두꺼운 외투 하나 없이 몸을 웅크린 채 떨었다. 그 무렵 강지윤은 따뜻한 빌라 안에서 값비싼 울 원피스를 입고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18년 동안 이어져 온 차별은 강지영에게 ‘가족’이란 단어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이제 단 한 달만 버티면 된다. 그녀는 지난 3년 동안 강지윤의 삶을 대신 살아온 대가로 60억을 받을 것이고 그 돈으로 이 도시를 떠나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 것이다. 그 생각에 잠시 기분이 나아질 무렵,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박태형이었다. 강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20분 내로 클라우디에 생리대 가져와.” 박태형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밤에 쓰는 걸로 말이야.” 뚝. 전화를 끊는 소리가 냉정하게 울렸다. 그 짧은 통화로도 강지영은 생리대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배시우의 생리 주기를 박태형은 회사 상장 날짜보다 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밖에는 폭우가 내렸다. 집에서 클럽 클라우디까지는 평소에도 차로 40분 거리였다. 그래도 강지영은 우산을 챙겨 나섰다. 차는 중간쯤 가다 완전히 막혀버렸다.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은 12분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차 문을 열었다. 빗물은 순식간에 옷을 적셨다. 미끄러운 도로 위에서 굽 높은 구두가 여러 번 미끄러졌다. 결국 강지영은 균형을 잃고 물웅덩이에 넘어졌다. 무릎이 화끈거릴 만큼 아팠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 달렸고 마침내 19분째에 클라우디에 도착했다. 룸 앞에서 노크를 하려던 찰나, 안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표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진짜 사모님께 그걸 가져오라고 시킨 겁니까? 댁에서 여기까지 최소 사십 분은 걸릴 텐데요.” “시우가 많이 아파해서.” 박태형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지영이는 어떻게든 맞춰올 거야.” “하긴, 사모님이 대표님을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죠. 3년 동안 대표님이 마음에 다른 사람을 두고 있어도 원망 한마디 없이 곁을 지켰으니까요.” 누군가 놀리듯 부추겼다. “그런데 대표님, 솔직히 사모님도 엄청 미인이시잖아요. 3년 동안 조금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습니까?” 룸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강지영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박태형이 몇 초 동안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무조건 시우야. 두 사람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시우를 택해.” 잔인할 만큼 단호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지영은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편이 놓였다. 그녀는 방 안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린 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와, 진짜 정확히 20분 안으로 왔네요.” “사모님, 왜 이렇게 흠뻑 젖으셨어요?” 박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이게 다 뭐야? 왜 이렇게 꼴이 엉망이야?” 강지영은 최대한 비에 젖지 않게 지킨 생리대를 내밀며 말했다. “20분 안에 오라고 했잖아. 당신이 급할까 봐 차에서 내려서 뛰어왔어.” 그녀는 넘어져 무릎이 까진 일도, 지금도 통증이 욱신거리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박태형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쳤다. “입어.” 그러고는 그녀의 손에 들린 생리대를 가리켰다. “여자 화장실로 가져다줘.” 강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안에서 배시우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생리대 갖고 왔어요.” 짧은 정적이 흐른 뒤,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강지영은 물건을 건네고는 말없이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무릎의 상처는 따끔거렸다. 침대에 누웠을 때, 그녀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방문이 쾅 걷어차이며 열렸다. 박태형이 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일어나!” 강지영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태형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으면서 계단 입구로 끌고 갔다. “태형 씨, 지금 뭐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힘이 그녀를 덮쳤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고 뒤통수가 계단 모서리에 부딪히며 굴러떨어졌다. 엄청난 고통이 순식간에 온몸을 휩쓸었다. 강지영은 피로 번진 시야 속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왜...” 그녀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물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 해요?” 박태형은 계단 꼭대기에 서 있었다. 역광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싸늘했다. “시우를 민 게 너지?” 강지영은 망연자실한 채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요?” “모르는 척하지 마.” 그는 한 걸음씩 계단을 내려왔다. “그동안 착한 척, 이해심 많은 척 다 하더니 이 순간을 기다린 거야? 네가 시우를 창가에서 밀었잖아. 전신 골절이야. 죽을 뻔했다고.” “그런 적 없어요...” 강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가 욱신거리며 시야가 흔들렸다. 박태형이 웅크려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챘다. “강지윤, 내가 몇 년간 잘해줬다고 설마 착각을 한 거야?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리는 정략결혼일 뿐이야. 너한테 감정 따위는 없다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또렷하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사랑, 난 영원히 줄 수 없어!” 강지영은 어지러움 속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한 번도 박태형의 사랑을 바란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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