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안신혜는 만삭의 배를 힘겹게 부여잡고 차주한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비켜 주세요. 차주한에게 꼭 전할 말이 있어요.”
“대표님께서 외부인 면회를 금하셨습니다.”
“저 차주한의 약혼자예요. 외부인 아니에요.”
안신혜는 조급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경호원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밖에서 처절하게 외쳤다.
“차주한! 우리 집에 일이 생겼어. 지금 날 도와줄 사람은 너뿐이야... 제발, 뱃속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나와줘!”
다름 아닌 본인의 핏줄이지 않은가? 아이를 봐서라도 안성 그룹이 망해가도록 수수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느 미친년이 감히 차씨 저택 앞에서 짖어대지?”
새침한 하이톤 목소리가 별장 안에서 울려 퍼졌다.
곧이어 새빨간 실크 슬립 차림에 풀메이크업을 한 여자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안재희?”
안신혜는 눈을 크게 떴다. 약혼자 집에서 자신의 의붓언니를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안재희는 계모가 아버지와 재혼하며 데려온 딸로, 명목상 안씨 가문의 자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계모의 사주를 받아 그녀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고, 두 사람의 사이는 오래전부터 앙숙 그 자체였다.
차주한과 안재희가 전혀 접점이 없는 거로 기억하는데 대체 별장에는 웬일이지?
안재희는 안신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냉소를 지었다.
“어머, 이게 누구니? 해성에서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안성 그룹 공주님 아니야? 다만 이제 곧 망해가기 직전이라 그냥 갈 곳 없는 떠돌이 신세잖아?”
안신혜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네가 여긴 왜 있어?”
“왜겠어? 주한이가 나 없으면 못 산다잖아. 기어코 하룻밤 같이 보내자고 하더라.”
안신혜는 흠칫 놀랐다.
“뭐라고? 둘이 지금...”
안재희는 우쭐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린 이미 오래전부터 함께였어.”
그러면서 도발하듯이 헐렁한 잠옷의 깃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쇄골 언저리에 선명한 검붉은 흔적들이 드러났다.
안신혜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를 악물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여우처럼 그동안 집에서 이간질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차주한이 어떻게 자기 아이를 품고 있는 여자를 배신하겠어? 직접 만나서 설명 듣기 전에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차주한! 당장 나와!!”
“지금 누구한테 막말이야!”
안재희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갑자기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힘껏 밀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무방비 상태의 안신혜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지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만삭의 배가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아악! 아파...!”
눈앞이 까매지며 정신이 아득했다.
따뜻하면서도 끈적한 액체가 허벅지를 따라 흘러내리며 바지를 적셨다.
‘피...?’
안신혜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배를 움켜잡은 채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경호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서, 빨리 의사 불러줘요. 나 좀 살려줘요...!”
안재희가 피식 비웃었다.
“널 살려줄 리 있겠어?”
아니나 다를까 경호원들은 고개를 돌리고 차갑게 외면했다.
안신혜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해졌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감히 차주한 아이를 해코지해? 넌 이제 죽었어.”
안재희는 코웃음을 치며 조롱했다.
“하, 너 설마 진짜 주한이 아이라고 믿는 거야? 외간 남자의 씨를 품고선 무슨 낯짝으로 계속 들이대? 네 뱃속의 그 잡종이 누구보다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바로 주한이야.”
“뭐, 뭐라고?”
“너 아직 모르지? 8개월 전, 그랑제 호텔에서 생신연이 열렸던 그날 밤 주한은 내내 나랑 함께 있었어. 주한이가 너한테 건넨 그 술맛, 어땠어? 나쁘지 않았지? 하하하.”
안신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
술을 마신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그날 밤의 남자가 차주한이 아니란 말인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바닥을 짚고 간신이 일어나 절망 섞인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아니야... 거짓말! 그럴 리 없어!”
안재희는 깔깔 웃으며 고통에 허덕이는 안신혜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내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야 뭐 고마울 따름이지. 네가 주한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안국성 그 늙은이도 외손주 본다고 급히 안성 그룹 경영권을 넘겼잖아. 덕분에 내가 그룹을 통째로 손에 넣을 수 있었지. 죽기 전까지도 내 팔을 꽉 잡고 눈을 못 감더라니까? 하하하.”
안신혜의 눈이 문득 커졌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동공 깊숙한 곳에서 충격과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너였어?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범인이? 안재희, 이 악녀야! 독사 같으니라고! 죽여버릴 거야!”
망연자실한 안신혜는 벌떡 일어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같이 죽자는 비장한 심정으로 안재희에게 달려들었다.
안재희는 깜짝 놀라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안신혜의 손톱에 할퀴어 볼에 실금 같은 상처가 생겼다.
외모에 유독 집착하는 그녀는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안신혜의 머리채를 덥석 움켜쥐고 땅에 연신 박았다.
쿵! 쿵!
“이 년이! 감히 내 얼굴을 할퀴다니! 죽어!”
안신혜는 저항할 힘도 없이 고통 어린 신음만 내뱉었다.
격분한 안재희는 미친 사람처럼 안신혜의 머리를 딱딱한 땅에 내리쳤다.
예쁘장하고 화사하던 얼굴은 어느덧 피투성이가 되었다.
결국 피바다에 엎드린 채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분풀이를 마친 안재희는 쓰레기처럼 안신혜를 내팽개치며 음산한 목소리로 경호원에게 지시했다.
“얼른 안성 그룹 지분 양도 계약서 가져와서 지장 찍게 해.”
경호원은 안신혜의 손을 붙잡아 바닥에 흥건한 피를 엄지에 묻히더니 계약서에 새빨간 지장을 찍었다.
안신혜는 힘겹게 눈을 떴지만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되어 눈앞이 흐릿했다. 곧이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안재희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럴 순 없어!’
그러다 아랫배에서 격렬한 자궁 수축과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안신혜는 몸을 웅크린 채 배를 부여잡고 피 웅덩이 속에 누워 끝없는 어둠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가야... 제발, 누가... 내 아기를 좀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