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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러나 하재호는 강유진의 방이 이토록 어지러운 이유가 그의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하재호는 전형적인 일 중독자였다. 강유진은 그의 수석 비서로서 하루 스물네 시간 대기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책상 위에는 그가 언제든 필요로 할 각종 서류가 쌓여 있었고 벽에는 일정 메모와 업무 계획표가 가득 붙어 있었다. 옷장에는 각종 연회용 예복이 걸려 있었으며 빈 곳에는 그가 클라이언트에게 보낼 선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좁은 임대주택은 사실상 그녀의 두 번째 사무실이었고 방 안에 놓여 있는 작은 싱글 침대만이 오로지 그녀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하재호는 그 침대가 너무 작다며 그 사건 이후로는 더 이상 그녀의 집을 찾지 않았다. 외출 전, 강유진은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주말에 물건 정리를 도와줄 사람을 불러 달라고 했다. 이제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정리할 때였다. 조우진이 선택한 월식 백반집은 최근 문을 연 곳으로 평판이 꽤 좋았다. 강유진이 위가 좋지 않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일부러 담백하고 위에 부담 없는 요리를 주문한 듯했다. 꽤 세심한 배려였다. 본디 마음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누구에게서 배울 필요가 없었다. 강유진은 늘 하재호가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생활 속 작은 부분들을 놓치는 것이라 믿어왔다. 그래서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했고 그런 하재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오늘 노윤서가 생리 중이라는 이유로 보양탕 집에 데려간 걸 보면 그도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강유진은 늘 입고 다니던 딱딱한 업무용 정장을 벗어 던지고 늘어지게 묶어 두기만 하던 머리카락도 풀어 내렸다. 희고 맑은 피부는 가벼운 옷차림과 어우러져 한층 더 빛을 발했다. 너무 달라진 모습에 조우진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자 강유진은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조 대표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조우진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강 비서님, 갑자기 이게... 너무 달라져서 몰라볼 뻔했잖아요.” 강유진은 자리에 앉으며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넘겼다. “강 비서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조우진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요.” 그녀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회사에 혹시 이상한 규정이 있나요?” “예를 들어 어떤 거요?” “예를 들어 예쁜 모습을 일부러 감춰서 못생겨 보이게 한다든지.” 강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칭찬이 아니라 저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능력 있는 헤드헌터, 특히 최고급 헤드헌터는 센스가 역시 남달랐다. 조우진은 단 몇 마디 대화만으로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룸에서 나오던 서태우는 창가에 앉아 있는 강유진에게 시선이 꽂혔다. 단순히 그녀의 외모 때문에 눈길이 갔다. 강유진이 앉은 자리에는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석양빛이 부드럽게 쏟아졌다. 그 빛 속에 온전히 잠겨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신성한 빛이 깃든 듯 한없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던 서태우는 무심코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침 강유진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서태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게 강유진이라고?’ 맞는 것 같았지만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필경 서태우의 기억 속 강유진은 늘 고전적인 옷차림에 여성스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재호의 안목을 의심하기도 했다. 주변에 예쁜 여자가 널리고 널렸는데 하필 강유진을 선택한 하재호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런 자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재호의 안목은 틀림이 없었다. 강유진은 서태우와 눈길이 마주쳤지만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듯 담담한 표정으로 이내 시선을 피했다.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서태우는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는 늘 강유진을 얕잡아 봤고 하재호의 부속품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지금 날 무시한 거야? 어디서 도도한 척이야!’ 조우진과 안면이 있었던 서태우는 일부러 다가가더니 강유진을 무시하고 조우진을 향해 말했다. “조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서태우가 비록 본업에는 소홀했지만 어찌 되었든 서씨 가문의 차남이었고 그의 뒤에는 막대한 자원이 있었기에 조우진은 자연스럽게 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당연히 스카우트 중이죠.” “스카우트요?” 서태우는 의미심장하게 강유진을 힐끗 바라보며 웃었다. 비웃음과 조롱이 섞인 표정이었다. “조 대표님, 스카우트 기준이 너무 낮은 거 아닌가요?” “낮다뇨? 강 비서님은 업계에서 인기가 매우 많은데요.” 서태우는 조우진의 말은 듣는 체도 않고 말했다. “아직 모르시나 보네요. 프라임 하 대표가 최근 해외에서 고급 인재를 영입했거든요. 웨스트 경영대학에서 금융학 박사까지 따낸 사람인데 현재 프라임캐피탈 투자3부 이사로 임명됐어요.” 그는 살짝 자랑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인재라면 조 대표님 회사에서는 최상급이겠죠.” 조우진은 솔직하게 답했다. “그렇죠. 그 정도의 스펙을 가진 사람이라면 최상급에 속하죠.” “그러니까요. 사람 고르는 수준을 좀 더 올려야죠.” 서태우는 조우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무례한 그의 태도에도 조우진은 기분 나쁜 표정 하나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서태우 씨.” 서태우는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고는 기분이 좋아진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 맞다. 제가 이 식당에 투자했거든요. 오늘 이 식사는 제가 사는 거로 하죠.” “그건 너무 죄송한데요.”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나중에 제가 조 대표님한테 부탁할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이번 식사를 계기로 친구가 되는 거로 생각하세요.” 떠날 때, 서태우는 오만한 표정으로 강유진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는 강유진의 얼굴에서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보고 싶었지만 강유진은 끝까지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서태우는 불쾌한 마음으로 하재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나 방금 누구 봤는지 알아?” 야근 중이던 하재호는 서태우의 물음을 무시한 채 내선 버튼을 눌러 비서실로 연결한 뒤 입을 열었다. “강 비서, 커피 한 잔 가져와.” 서태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뭐야? 강유진이 회사에 없다는 것도 모르는 거야?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커피를 기다리던 하재호는 그제야 서태우의 물음에 대답했다. “누굴 봤는데?” “조우진.” 서태우는 에둘러 말했다. “누구를 스카우트하고 있더라고.” 그때 누군가 하재호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고 들어오라는 그의 말과 함께 주채은이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하재호는 잠시 멈칫하다 눈썹을 찡그리고 물었다. “강 비서는?” “퇴근했습니다.” 주채은의 말에 하재호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퇴근했다고?” “네.” 하재호는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강유진은 다른 업무가 많았으니 그저 다른 일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주채은을 내보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하재호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익숙한 맛이 아니었다. 더 이상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았던 하재호는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그래서 누구를 스카우트했는데?” 드디어 핵심을 묻자 서태우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강유진. 조우진이 강유진을 스카우트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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