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서태우는 하재호가 놀랄 줄 알았지만 그의 반응은 의외로 평온했다.
“조우진, 아직 포기하지 않았나 보네.”
“그 말은 조우진이 강유진을 노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뜻이야?”
“응.”
하재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오히려 단호하게 말했다.
“못 데려가. 강유진은 절대 프라임에서 못 나가거든.”
서태우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며 비웃었다.
“그건 그래. 강유진이 어떻게 프라임을 떠나겠어.”
서태우는 다른 조건은 일단 제쳐두고 하재호가 프라임에 있는 한 강유진은 결코 프라임을 떠날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강유진이라는 여자, 속셈이 너무 많아. 내가 보기엔 일부러 조우진을 월식으로 불러내서 내가 보게 만든 다음 형한테 말하도록 유도한 것 같아. 그래서 형이 강유진을 잡아달라는 뜻이겠지.”
서태우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한 표정으로 조롱하듯 말했다.
“형이 요즘 윤서 누나한테 더 신경 쓰니까 이런 속셈을 부리는 거야. 참 저속하고 분수를 몰라. 남자는 여자가 질투하고 속셈을 부리는 걸 제일 싫어하는데 그럴수록 형이 더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드나 봐.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몰라.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어떻게 감히 윤서 누나랑 비교해. 조금만 생각해 봐도 형이 누구를 선택할지 뻔한 거 아니야?”
서태우의 수다를 들어줄 시간이 없었던 하재호는 간단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 중, 하재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강유진의 사직서였다.
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사직서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나머지 문서 서명을 계속했다.
조우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기분이 좋아진 강유진은 집으로 오는 길에 꽃집에 들러 스스로에게 선물할 꽃 한 송이를 샀다.
하지만 집에 들어서서야 꽃을 꽂을 꽃병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집 안 가득 쌓인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물건들을 훑어보던 그녀는 좋았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강유진은 종이상자를 찾아 모든 서류를 담고 나서야 겨우 식탁을 비워냈다.
주위를 둘러보며 꽃을 꽂을 만한 것을 찾던 그녀는 드디어 마땅한 물건을 찾아냈다.
바로 상패였다. 프라임 우수 직원 상패.
하재호가 직접 강유진에게 준 상이었고 그녀는 그 상패를 늘 소중히 간직해왔다.
지난번 술에 취해 강유진의 집에서 자던 신하린이 한밤중에 속이 안 좋다고 일어나더니 상패를 붙잡고 구역질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날 강유진은 상패가 더럽혀질 바엔 차라리 침대가 더럽혀지는 게 낫다며 신하린의 손에서 상패를 빼앗아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물건도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강유진은 상패에 물을 받아 꽃을 꽂아놓고 잠시 바라보더니 스스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쓸모가 있네.”
잠들기 전 강유진은 휴대폰을 끄고 자는 습관을 들였고 덕분에 밤새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 9시가 다 되어야 강유진은 회사에 도착했다.
늘 가장 먼저 출근하던 그녀가 출근 시간이 다 되어야 나타나자 모두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오늘은 평소의 딱딱한 직장용 복장이 아닌 연한 색 계열의 셔츠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강 비서님, 오늘 분위기가 좀 달라 보이네요.”
동료의 말에 강유진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요?”
“예뻐요.”
정확히 말하면 너무 예뻤다.
연한 화장만 했을 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고, 투명하고 깨끗하며 단아하고 우아했다.
절대적인 기품을 가진 아름다움으로 남녀 모두를 사로잡는 유형이었다.
“고마워요.”
강유진은 기분이 한층 밝아졌다.
출근길에 아침을 챙겨 먹었던 강유진은 약을 챙기기 위해 탕비실로 향했다.
문 앞으로 다가가자 안에서 동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강 비서님과 노 이사님, 누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세요?”
“두 사람은 스타일이 달라서 비교가 안 되지 않을까요?”
“예전 같으면 노 이사님 쪽이 더 예뻤겠죠. 필경 예전에 강 비서님은 너무 딱딱하고 복장과 화장이 올드했잖아요. 하지만 강 비서님은 원래 피부가 좋으니 조금만 손봐도 눈에 띄네요.”
“맞아요. 분위기가 너무 우아해서 ‘언니’라고 부를 뻔했잖아요.”
“외모만 따지면 강 비서님이 조금 더 예쁘지 않아요? 노 이사님의 학력과 출신은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맞아요. 지능과 출신은 타고나는 거니까요.”
“강 비서님은 한부모 가정에서 컸다고 들었어요.”
강유진은 적절한 시점에 문을 열어 동료들의 수다를 끊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강유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물을 받으며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약을 먹고 다시 자리에 돌아오자 투자3부 팀장 심하영이 급하게 강유진을 찾고 있었다.
“강 비서님, 하 대표님이 카이로스 드론 프로젝트 평가 보고서를 달라고 하셨어요.”
강유진이 자료를 건네자 심하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강 비서님, 혹시 휴대폰 고장 났어요?”
“아니요.”
강유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연락이 안 된 거예요? 하 대표님이 오늘 아침 출장을 가시면서 급히 이 보고서를 가져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연락이 안 되더라고요.”
심하영의 설명에 강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배터리가 없었나 보죠.”
너무 억지스러운 핑계였지만 심하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 대표님이 노 이사님과 함께 카이로스 드론 프로젝트 현장에 갔어요. 아마 다음 주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일단 제가 이 보고서를 전달해 드릴게요.”
강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컴퓨터를 켜 오늘의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드론 프로젝트는 이전부터 강유진이 주도하고 있었고 두 차례의 현장 조사와 조율도 모두 그녀가 담당했다.
하재호는 단 한 번도 이 프로젝트에 관여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직접 현장을 방문한 적도 없었다.
그저 프라임의 여러 프로젝트 중 하나일 뿐이었고 하재호가 직접 나설 단계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재호가 직접 현장에 나섰다.
누가 봐도 이유는 명확했다. 그는 프로젝트를 살피러 간 것이 아니라 노윤서를 위해 뒤에서 힘이 되어주려는 것이었다.
‘아주 완벽한 바늘과 실이네.’
하재호가 회사에 없으니 강유진의 업무 부담은 절반으로 줄었다.
게다가 투자3부 프로젝트를 맡지 않아도 되니 온전히 여유가 생겼고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강유진은 퇴근 후 위에 좋은 한약을 처방받기 위해 김성민 한의사와 만날 계획이었다.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던 터라 제대로 관리가 필요했다.
김성민은 강성에서 유명한 한의사였는데 평소 진료 예약을 잡기 어렵기로 유명했다.
예전에 강유진은 클라이언트 가족을 관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병원에 다니며 진료 예약을 받았다.
횟수가 많아지자 자연스레 김성민과도 친분이 생겼다.
그는 강유진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늘 몸을 챙기라고 당부했다.
“젊다고 몸을 함부로 굴면 안 돼. 나중에 늙으면 다 후회해.”
이날 김성민은 강유진이 어쩌다 본인을 위해 예약을 했다는 말에 늦은 시간임에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유진이 반쯤 오는 길에 카이로스 대표 송하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강 비서님, 문제가 생겼어요. 이쪽으로 빨리 오세요!”
강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무슨 일인지 물었고 송하준은 격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프라임 측에서 현장을 살펴본 뒤 프로젝트를 논의했는데 노 이사님이 이미 합의한 평가액에서 3%를 강제로 낮추는 거예요. 카이로스 드론이 산업용에 치중되어 상업적 가치는 낮고 시장 점유율도 다른 상업용 브랜드보다 떨어진다나 뭐라나. 강 비서님, 만약 강 비서님이 다른 투자자보다 더 진심을 담아 협력 방안과 전망 계획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프라임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시 많은 투자자가 우리 카이로스와 협력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나오면 도덕적으로 문제죠! 지금은 강 비서님과만 얘기하고 싶습니다. 안 오면 이 프로젝트는 여기서 마무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