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꺄악!”
강다혜가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물 대부분은 계민호의 몸에 쏟아졌지만 계민호는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홍유빈을 보고 얼굴이 급변했다.
“홍유빈, 너 미쳤어?”
강다혜는 긴 머리가 물에 젖어 두피에 달라붙은 채 말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녀 역시 벌떡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언니, 제정신이에요? 왜 우리한테 물을 끼얹어요!”
홍유빈은 차갑게 웃었다.
“내 방에서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었잖아. 물 맞는 게 당연하지 않아?”
“대표님, 사정이 그렇게 안 좋은 거예요? 밖에 나가 호텔 잡을 돈도 없어요?”
계민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헛소리하지 마. 다혜가 발밑을 못 보고 실수로 넘어졌을 뿐이야.”
강다혜는 속으로 우쭐해하며 겁먹은 척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언니, 오해예요. 저랑 민호 오빠가 대낮에 여기서 그런 일을 할 리가 있나요... 그냥 민호 오빠가 절 잡아주려다가 제가 끌어당긴 거예요.”
홍유빈은 그들의 해명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
“얘기 지어내는 거 들을 시간 없어. 됐고, 당장 꺼져.”
계민호는 이를 악물었다.
“홍. 유. 빈!”
“그만 불러요. 힘 아껴둬야죠. 밤에 침대에서 소리 지르려면.”
홍유빈이 고용한 건장한 남자 셋이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곧바로 1층을 가리켰다.
“자, 다들 저 피아노 보이죠? 피아노 기준 반경 10미터 안에 있는 거 전부 밖으로 던져요. 아, 그리고 저 소파도 버려요.”
마지막으로 홍유빈은 방 안을 냉랭하게 훑으며 비웃듯 말했다.
“아, 그리고 이 침대도요! 정말 너무 더러워 죽겠네. 이것도 버려요!”
강다혜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너, 너 내 피아노는 버리면 안 돼! 그건 내 첫 번째 소중한 피아노야! 버리면 안 된다고!”
홍유빈은 팔짱을 끼고 냉소했다.
“강다혜, 내 집은 쓰레기장 아니야.”
“전부 다 버려요!”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 없는 강다혜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계민호의 소매를 붙잡았다.
“민호 오빠, 나... 언니가...”
계민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홍유빈, 내 앞에서 꼭 이래야겠어?”
홍유빈은 입꼬리를 올렸다.
“대표님, 어제 제가 퇴사한 거 잊으신 것 같네요. 전 더 이상 계민호 대표님 부하직원도 아닌데 제가 왜 무서워해야 하죠?”
계민호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그는 몸을 숙여 강다혜를 안아 들었다.
“다음에 네가 나한테 매달릴 땐 이렇게 좋게 안 넘어갈 거야!”
말을 끝으로 계민호는 강다혜를 데리고 유원을 떠났다. 강다혜는 정원이 엉망이 된 모습을 보며 눈에 원한을 담았다.
‘홍유빈, 오늘의 굴욕은 반드시 기억해 두겠어!’
...
홍유빈은 침착하게 인부들을 지휘했고 한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별장 안에서 강다혜의 흔적은 전부 사라졌다.
“잘했어요.”
그녀는 쿨하게 돈을 내고 쓰레기 운반 차량까지 불러 정원도 말끔히 정리했다.
홍유빈은 속이 다 시원해졌다. 하지만 불과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핸드폰 화면에 이름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여보세요, 유빈아. 너 미쳤니? 다혜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애가 거의 울어서 쓰러질 지경이야! 유원 준다고 했잖아. 그렇게까지 급할 필요가 있었어?”
홍유빈은 입술을 다물었다.
“네, 급해요. 원래 제 건데 제가 왜 급하면 안 되죠?”
안서화는 말문이 막히더니 곧 위협했다.
“회사 지분 필요 없어?”
홍유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맘대로 하세요. 딸한테 소송당하고 싶으면 안 주셔도 되고요. 그런데 엄마, 할머니 아직 살아 계시잖아요. 진짜로 법대로 나누면 엄마 손에는 얼마나 남을까요?”
“예전엔 욕심 안 부리고 가만히 있었다고 해서 그게 제 것이 아닌 건 아니에요. 이 점은 분명히 아셔야 해요.”
안서화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순하고 말 잘 듣던 딸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유빈아, 너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니?”
홍유빈은 냉소를 흘렸다.
“제가 예전에 너무 쓸모없었으니까 엄마한테 이렇게까지 휘둘린 거죠. 이제 더는 바보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계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홍유빈의 표정은 담담했다.
역시나 다음 순간, 강도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빈아, 나다. 아저씨야. 네 엄마가 지금 좀 흥분한 것 같아서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네가 심씨 가문이랑 혼사도 정해졌으니 이번 주 토요일에 두 집안이 만나서 결혼 얘기를 좀 하자. 아저씨가 네 몫은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둔다고 약속할게.”
“네, 그럼 토요일에 뵐게요.”
전화를 끊자 강도형은 못마땅한 얼굴로 안서화를 바라봤다.
“당신은 애 하나도 제대로 못 다루나?”
안서화는 말문이 막혔다.
“나도... 유빈이가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몰랐어요.”
강도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애가 크면 속이 깊어지는 법이야. 이상할 것 없어. 지금은 정면으로 부딪치지 말고 결혼부터 확실히 굳힌 다음에 얘기해. 이 일은 다혜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고.”
안서화는 입술을 삐죽였다.
“알겠어요.”
...
홍유빈은 보양식을 챙겨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졌다. 홍유빈은 집에 간병인을 모시려 했지만 할머니 본인이 요양병원에 들어가겠다고 고집했다. 번거롭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그녀는 환경이나 의료 시설 모두 괜찮은 요양병원을 골랐고 주말마다 찾아뵈었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 문제는 늘 할머니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어르신, 손녀분 오셨어요.”
홍유빈은 웃으며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인상이 인자한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녀를 바라봤다.
“유빈이 왔구나.”
“할머니, 요즘 다리는 안 아프세요? 한의사 불러서 침이라도 맞아볼까요?”
김혜옥은 손을 내저었다.
“됐어, 이 늙은 다리로 무슨 침이야.”
잠시 후, 홍유빈은 가방에서 혼인신고서 서류를 꺼냈다.
“할머니, 저 결혼했어요.”
김혜옥의 표정이 잠시 멍해지더니 곧 얼굴이 환해졌다.
“전에 말한, 키 크고 듬직하던 그 남자친구니?”
홍유빈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계민호와의 관계를 그녀는 할머니에게 단 한 번 언급했을 뿐이었다. 사진은 보여주지 못하고 몰래 찍은 옆모습 사진 한 장만 보여줬었다.
그녀는 할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네, 할머니. 저희 결혼했어요. 결혼식은 소소하게 할 생각이에요. 다 간소하게 하고 그 사람이 바쁜 일 끝나면 같이 할머니 뵈러 올게요.”
“그래, 그래! 참 잘됐다.”
김혜옥은 홍유빈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데려가 여러 겹 옷 속에 숨겨둔 상자를 꺼냈다.
“자, 유빈아. 이건 내가 너 시집갈 때 주려고 모아둔 거다. 이 할미가 돈이 많진 않아. 다 예전에 네 할아버지랑 네 아빠가 남겨준 거야.”
홍유빈은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꺼낸 통장을 보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할머니, 전 필요 없어요. 이건 할머니 노후 자금으로 쓰세요.”
그러자 김혜옥은 손녀를 노려봤다.
“내가 여기서 하루 종일 지내는 데 돈이 얼마나 들겠니? 이건 네 아빠가 명절마다 보내주던 돈이야. 이것저것 모여서 한 십억은 된다. 네가 챙겨. 그리고 네 아빠 호텔, 다시 들어가서 일할 생각은 없니? 네가 원하면 내가 네 엄마한테 말해줄게.”
홍유빈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 아직은요. 호텔은 언젠가 꼭 돌아갈 거예요. 필요할 때 그때 말씀드릴게요.”
“그래, 다 네 뜻대로 해.”
...
“신 대표님, 심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신시후는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죠?”
“우리 그룹 산하, 클라우드 레스토랑입니다.”
남자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날 일정 전부 비워둬요. 그리고... 바로 옆에 내가 쓸 방 하나 따로 잡아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