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뭘 해? 결혼?”
그 말을 들은 계민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품에서 안 일어나겠다고 버티던 사람이, 오늘 와서 결혼한다고? 홍유빈, 너 지금 일부러 나 자극하려고 이런 핑계 댄 거잖아.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
홍유빈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계민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당하게 공개하지 못한 관계로 3년이나 비밀 연애를 했겠는가.
그녀가 결혼한다고 말하는 이유라고는 질투해서 자신을 자극하려는 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홍유빈은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안 믿네요? 그럼 혼인신고서라도 보여줄까요?”
계민호의 눈동자에 어두운 기색이 일렁였지만 문밖에서 들려온 맑은 목소리에 끊겼다.
“민호 오빠, 내가 디저트 만들어서 가져왔어요!”
강다혜는 홍유빈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달콤하게 웃었다.
“언니도 여기 있었네요. 언니, 민호 오빠랑 얘기 중이었어요?”
홍유빈은 비웃듯 웃었다.
“아니. 두 사람 얘기해. 우린 이미 끝났으니까.”
“그럼 대표님,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계민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표정은 알 수 없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강다혜가 있어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홍유빈의 관계가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강다혜가 홍유빈을 불러 세웠다.
“언니, 엄마가 언니 요즘 집에 안 온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늘 저녁 같이 먹고 갈래요? 엄마랑 동생도 언니 보고 싶대요.”
이내 그녀는 수줍게 남자를 바라봤다.
“민호 오빠, 우리 아빠가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우리 결혼 얘기 좀 하자고 하셨어요. 시간 돼요?”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에 옅은 웃음이 섞였다.
“다혜야, 네가 부르면 언제든 시간 있지.”
말을 마친 뒤 계민호는 앞에 선 여자의 하얀 목덜미를 무심한 듯 훑어봤다.
홍유빈은 코끝의 시큰함을 눌러 참았다.
“강씨 가문 가족 모임엔 난 안 갈게.”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강다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고개를 들어 계민호를 보자 이미 닫힌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민호 오빠?”
그제야 계민호는 정신을 차렸다.
“응.”
“오빠, 빨리 내가 디저트 좀 먹어봐요.”
계민호는 원래 단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강다혜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장식으로 된 딸기 한 조각만 맛봤다.
“맛있어, 다혜야.”
“진짜요? 그럼 다음에는 다른 것도 해줄게요. 그런데 오빠...”
강다혜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아까 언니랑 무슨 얘기 했어요?”
“별거 아니야. 업무 얘기 조금 했어. 그 얘긴 하지 말자.”
강다혜는 귀가 없는 게 아니었다. 들어오기 전 안에서 분명 결혼 얘기가 들린 것 같았다.
‘누가 결혼을 한다는 거지?’
‘설마 언니가?’
...
강다혜는 오래 머물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안서화는 딸을 보며 웃었다.
“다혜 왔니. 아줌마, 우리 다혜한테 좋은 거 가져와요!”
홍유빈과 달리 안서화는 이 의붓딸 앞에서는 언제나 극진했다. 강씨 가문에 시집온 지 거의 20년이 지났지만 남편의 전처 소생인 이 아이를 친딸처럼 키웠다.
강다혜는 안서화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홍유빈을 자극하기 위해서라면 모녀 사이가 깊은 척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엄마, 오늘 저녁에 민호 오빠가 와서 우리 결혼 얘기할 거예요. 맛있는 거 많이 준비해 달라고 해줘요.”
“그래, 알아. 이미 다 준비하라고 해놨어.”
안서화는 웃으며 딸을 앉혔다.
“다혜야, 이번에 귀국했으니 말인데 유원은 좀 낡지 않았니? 나랑 네 아빠 생각엔 더 넓은 곳으로 바꿔서 연습실로 써도 좋을 것 같아.”
강다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안서화를 바라봤다.
“왜요? 엄마, 낡긴 했어도 풍경이 정말 좋아요. 난 거기 마음에 들어요.”
안서화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홍유빈 쪽에서 유원을 반드시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안서화는 인내심을 갖고 계속 강다혜를 설득했다.
“다혜야, 경치 좋은 별장은 많잖니. 나중에 엄마가 같이 가서 새로 하나 골라주마. 다른 뜻은 없고 그냥 네게 제일 좋은 걸 주고 싶어서 그래.”
강다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엄마, 언니가 엄마한테 뭐라고 한 거 아니에요? 난 어디도 안 갈 거예요. 난 유원만 쓸 거예요.”
안서화는 곤란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달랬다.
“유빈이가 유원을 달라고 한 건 사실이야. 그건 유빈이 아빠가 남긴 별장이잖니. 다혜야, 거긴 낡기도 했고 유빈이한테 주는 게 뭐 그리 큰일은 아니잖니. 안 그래?”
그때 2층에서 내려오던 소년이 이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엄마, 우리 큰 누나가 언제부터 이렇게 욕심이 많아졌어요? 전에는 안 달라더니, 하필 다혜 누나 귀국하니까 달라고 하네요?! 제가 전부터 말했잖아요. 큰누나는 속을 알 수 없는 독사 같은 사람이니까 엄마도 좀 거리를 두세요.”
강재민은 안서화가 재혼한 뒤 낳은 아들이었고 강다혜와 훨씬 더 가깝게 지내며 자연스럽게 자신과 성이 다른 그 누나를 싫어했다.
학생이던 시절 홍유빈은 여름방학마다 강씨 가문에 잠시 머물 때마다 이 남매에게 적잖이 괴롭힘을 당했다.
하지만 안서화는 매번 홍유빈에게 맏이니까 좀 넓게 이해하라고만 말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홍유빈은 강씨 가문에 머무는 걸 꺼리게 됐고 방학이 되어도 차라리 조부모와 함께 지내기를 택했다.
안서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재민아, 그래도 네 누나잖니. 그렇게 무례하게 말하면 안 돼.”
강재민은 가볍게 비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쨌든 홍유빈은 우리 다혜 누나 거 못 가져가요!”
조용히 듣고만 있던 강도형이 아들을 한 번 노려봤다.
“어머니 앞에서 예의가 없구나!”
“됐다. 유원은 네 엄마랑 전남편의 재산이야. 우린 원래 가질 생각도 없었어. 다혜야, 아빠가 더 큰 거 하나 사줄게. 말 들어.”
강도형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가 홍유빈 편을 들어준 건 아니었다. 약속된 혼사에 변수가 생기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강다혜는 입술을 깨물며 속이 잔뜩 상했다. 분위기가 나빠진 건 전부 홍유빈 때문이었다. 귀국하자마자 기분을 망쳐놓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아버지가 내린 결정은 더 이상 바꿀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강다혜는 이 분을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
...
홍유빈이 퇴사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머니가 약속했던 것을 되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힘 좋은 남자 셋을 고용했는데 유원에 들어서자 유원을 관리하던 아주머니가 몹시 당황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진미숙은 늘 혼자서 유원 전체를 관리해왔다.
“아주머니, 이제 제가 여기 살 거예요. 오늘 짐 정리하러 왔어요.”
진미숙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유빈 씨, 오늘 다혜 씨도 안에 계셔서요. 다음에 다시 오시는 게...”
홍유빈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그 애가 있으면 뭐가 다른데요?”
그녀는 차고에 세워진 익숙한 벤틀리를 보고 얼굴이 싸늘해졌다. 홍유빈은 진미숙의 만류를 무시하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유원은 예전의 모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안은 강다혜의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고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홍유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2층을 바라보다가 숨을 깊게 들이쉬고 한 계단씩 올라갔다.
자신의 침실 근처에 다다르자 안에서 애교 섞인 신음이 들려왔다.
“민호 오빠, 아파요... 좀 살살해줘요.”
홍유빈은 옆에 늘어뜨린 손을 꽉 쥐었다.
그녀는 얼굴을 굳힌 채 옆 화장실로 가서 물을 한 양동이 담아 다시 침실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곧이어 옷이 흐트러진 남녀에게 다가가 망설임 없이 물을 세차게 끼얹었다.
“둘 다, 내 침대에서 당장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