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고태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왔으면 노크를 해야지.”
서규영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족끼리 화기애애하게 시간을 보내길래 방해하기 싫어서 그랬지.”
고태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랑 해은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서규영이 비아냥댔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알겠어?”
“서규영, 너 언제부터 이렇게 천박해진 거야?”
서규영은 몸을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고태빈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롱 어린 어투로 말했다.
“고태빈, 교양 있고 널 사랑하고, 널 이해해 주고, 네 잘못까지 다 감싸주던 서규영은 오늘 죽었어.”
고태빈은 서규영의 눈빛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때 침대맡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영 언니, 저랑 태빈 오빠 사이를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랑 태빈 오빠는 아무 사이 아니에요.”
박해은은 출산한 지 얼마 안 됐는데 화장을 하고 있었다. 정성 들여 생얼 메이크업을 한 박해은은 청순하고 착해 보였다.
흰색의 실크로 된 슬립 스커트를 입은 박해은은 가슴이 크고 허리가 얇아 굉장히 섹시해 보였다.
박해은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당황한 표정을 해 보이며 다급히 해명하려고 했다.
“규영 언니, 전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국내에는 기댈 사람이 없어요. 친구도 없고요. 그래서 태빈 오빠한테 도움을 구한 거예요. 그런데 제 아이가 태빈 오빠 아이라고 오해할 줄은 몰랐어요.”
박해은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지금 바로 태빈 오빠를 돌려드릴게요.”
서규영은 코웃음을 쳤다.
“나한테 돌려주겠다고요? 우스운 소리를 하네요. 고태빈이 처음부터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죠.”
서규영은 박해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박해은 씨, 방금 기댈 사람이 없다고 했죠? 그런데 해은 씨는 박씨 가문 딸이잖아요. 비록 친딸은 아니지만 그래도 박씨 집안에서는 해은 씨를 내쫓지 않았죠.”
“그래요. 그 집으로 돌아가기 싫을 수도 있죠. 그런데 해은 씨 친어머니가 여기서 5km 정도 떨어진 아파트에서 살고 있잖아요. 출산했으면서 자기 어머니를 찾아가지 않고 남의 남편을 찾아오는 건 무슨 경우인가요? 그리고 다른 사람 가정을 파탄 낼 생각이 없다면서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하는 신성한 일을 유부남을 꼬시는 데 이용하다니, 너무 저급한 거 아닌가요?”
“그것도 그 유부남의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 말이죠. 남의 남편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놓는 거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어요? 아기를 이용해서 남자를 꼬시고, 불쌍한 척하면서 남의 남편을 가로채려고 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해은 씨 눈에 다른 사람은 다 멍청이로 보이나 봐요. 그래서 내가 해은 씨의 그 더러운 속셈을 눈치 못 챌 줄 알았나 봐요.”
오후에 로펌에서 서규영은 박해은의 가정사를 알게 되었다.
박해은은 서규영의 말에 완전히 넋이 나가서 반박하지 못했다.
한참 뒤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태빈을 향해서 말했다.
“태빈 오빠, 언니 데리고 돌아가. 앞으로는 여기 절대 오지 마. 나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으니까 나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박해은이 그렇게 얘기할수록 고태빈은 더 그녀를 안쓰러워했다.
고태빈은 아이를 안고 박해은의 앞에 서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쟤는 신경 안 써도 돼. 넌 그냥 여기서 마음 편히 지내. 너랑 네 아이 내가 잘 보살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꼭 지킬 거야.”
말을 마친 뒤에는 박해은에게 아이를 건네고 몇 걸음 만에 서규영의 앞에 도착해 그녀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서규영, 너 오늘 왜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굴어? 네 꼴 좀 봐. 너 지금 진짜 못 배운 아줌마 같아 보여.”
서규영은 고개를 들면서 경멸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겨우 몇 마디 했다고 벌써 마음이 아파?”
“너 어떻게 해은이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지금 해은이가 어떤 처지인 줄 알아? 6년 전에 박씨 가문 친딸이 돌아온 뒤로 해은이는 그 집안에서 버림받았어. 해외 유학 보내준다고 해놓고 정작 생활비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그리고 해은이 친어머니는 도박에 미친 사람이야. 해은이 인생에 도움 안 되는 거머리 같은 인간이지. 그래도 해은이는 그동안 본인이 노력해서 베르몬 대학교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칩 디자인 석사 학위를 받았어.”
“솔직히 얘기할게. 해은이는 내가 이번에 거액의 연봉을 제시해서 우리 해빈 테크 CTO로 스카우트한 인재야. 해은이 산후조리 끝나면 바로 일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다시는 이딴 무례한 짓 하지 마. 해은이는 너랑 달라. 너처럼 밥하고 빨래 하는 아줌마도 아니고, 남자 때문에 다른 여자를 질투하지도, 네가 말한 방식으로 남자를 꼬시는 여자도 아니니까. 해은이는 순진한 사람이라 그런 교활한 짓은 하지 못해. 그리고 해은이처럼 뛰어난 인재는 틀림없이 앞으로 본인 분야에서 아주 큰 성과를 이룰 거야.”
고태빈의 말은 칼이 되어 서규영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고태빈은 서규영을 할 줄 아는 것은 집안일과 질투밖에 없는 아줌마로 생각했고, 또 한편으로는 박해은의 능력을 인정하며 그녀를 매우 가련히 여기고 또 아꼈다.
고태빈은 회사 창립 초반에 서규영이 CTO였다는 걸 완전히 잊은 듯했다.
사실 고태빈의 말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그동안 박해은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왜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박해은의 아이가 대체 누구의 아이인지 등 의문점들 말이다.
그러나 이젠 상관없었다.
서규영은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서류와 펜을 꺼내 고태빈에게 건넸다.
“고태빈, 난 네 그 시답잖은 말들 들어줄 생각 없어. 그러니까 그냥 사인해.”
고개를 숙인 고태빈은 이혼합의서를 본 순간 표정이 바로 어두워졌다.
“서규영, 너 그 말 무슨 뜻이야?”
“우리 결혼한 지 3년밖에 안 됐고 공동재산은 많지 않아. 난 회사 주식도 필요 없어. 대신 내 결혼 전 재산은 다 가져갈 거야. 문제없으면 빨리 사인해.”
고태빈은 이혼합의서를 확인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
서규영은 평온한 얼굴로 고태빈을 바라보았다.
“너랑 이혼하겠다고. 고태빈, 나 너 버릴 거야.”
서규영은 아주 차분하게 말했고 반대로 고태빈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서규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서규영, 너 지금 내 관심 끌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이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이렇게 이혼합의서를 들이밀면서 날 협박하려는 거야? 이혼하고 싶어? 좋아. 네 뜻대로 해줄게. 대신 앞으로 날 찾아와 울면서 나한테 애원하는 일은 없어야 해.”
고태빈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는 서규영이 이혼합의서로 자신을 협박할 줄은 몰랐다.
서규영은 그가 이런 같잖은 수작 때문에 타협할 줄 알았던 것일까?
조금 전 고태빈은 이혼합의서 내용을 쭉 훑어보았다.
서규영은 크게 원하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주식조차 바라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가 심하게 어긋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그동안 서규영이 자신을 위해서 했던 일들을 떠올린 고태빈은 서규영이 홧김에 그러는 거라고 확신했다.
고태빈은 펜을 들어 이혼합의서에 사인했다.
“서규영, 뭐든 적당히 해야 하는 법이야. 넌 이미 선을 넘었어. 그러니 그 결과도 네가 감당해.”
고태빈은 말을 마친 뒤 떠났다.
그는 30분도 되지 않아 서규영이 먼저 그를 찾아와 사과하며 용서를 빌 거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