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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고태빈이 떠난 뒤 서규영은 이혼합의서를 들고 잠시 멍해 있었다. 그러다 뒤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영 언니.” 몸을 돌린 서규영은 박해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았다. 조금 전의 가련한 척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박해은은 연기를 그만두고 서규영에게 다가가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선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전 박해은이라고 해요. 해빈 테크 CTO이자... 규영 언니 남편의 가까운 지인이에요.” 서규영은 박해은과 악수하지 않고 평온한 눈빛으로 박해은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관찰하듯 말이다. “어머, 요즘 내연녀들은 자신이 내연녀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자신을 가까운 지인이라고 소개하는 게 유행인가 봐요?” 박해은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서 거만함이 점점 더 짙어졌다. “서규영 씨가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제가 태빈 오빠 옆자리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서규영 씨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해빈 테크 이름이 왜 해빈 테크인 줄은 알아요? 저랑 오빠 이름 한 글자씩 따서 그래요. 태빈 오빠는 창업했을 때 이미 규영 씨랑 결혼했는데 회사 이름은 제 이름을 따서 만들었어요. 우습지 않아요? 태빈 오빠는 규영 씨 남편인데 말이죠.” “참, 깜빡하고 얘기 못 할 뻔했네요. 태빈 오빠가 규영 씨랑 결혼한 이유는 규영 씨랑 결혼하면 돈이 안 들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규영 씨는 집안 형편이 좋잖아요. 그래서 규영 씨가 준비한 예단 다 팔아서 저 유학 보내줬어요. 그동안 제가 유학하면서 쓴 생활비도 다 태빈 오빠가 대줬고요.” 박해은은 마치 자랑하듯 털어놓았다. “그동안 태빈 오빠 저한테 16억은 족히 썼을걸요?” 그러면서 팔짱을 낀 채로 서규영의 평범한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태빈 오빠 규영 씨한테 가방 하나 사준 적 없죠?” 서규영은 그 자리에 서서 손가락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박해은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녀는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고태빈에게 굳이 따지지 않은 이유는 따져봤자 수모만 당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고태빈이 그동안 그녀가 결혼할 때 준비했던 예단을 팔아서 박해은의 유학 자금을 대준 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서규영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갑자기 고태빈이 친구에게 빌려줄 돈 8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그녀에게 8천만 원을 달라고 했던 걸 떠올렸다. 그때가 박해은이 유학을 떠났을 때쯤이었다. 그 뒤로 서규영은 고태빈에게 8천만 원을 돌려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서규영은 지난 10년간 고태빈을 좋아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의 진짜 모습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서규영은 고태빈이 태생적으로 쌀쌀맞고, 낭만도 모르고, 웃음도 적고 말수도 적은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동안 서로를 존중하며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전부 틀렸다. 고태빈은 박해은의 편을 들 때는 말이 아주 많았고 박해은을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웠으며 박해은 앞에서는 웃을 줄도 알고 얼굴을 붉힐 줄도 알았다. 예전에는 고태빈이 최소한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박해은을 위해 온갖 더럽고 역겨운 짓을 했었고, 서규영은 그동안 그걸 몰랐을 뿐이다. 서규영이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자 박해은은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규영 씨, 서규영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랑 태빈 오빠 사이에 끼어들지도 못했던 거예요.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빠지길 바랄게요.” 서규영은 감정을 추스른 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난 고태빈과 이혼할 거예요.” 박해은은 매우 기뻤다. 그녀는 서규영이 조금만 자극을 줘도 바로 이혼하겠다고 할 정도로 나약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서규영의 도도한 성격이 박해은에게는 오히려 이득이었다. 고태빈의 말처럼 서규영은 멍청할 뿐만 아니라 아주 단순했다. 그런데 박해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서규영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이혼하기 전에 내 돈 돌려줘요.” 박해은은 어리둥절해졌다. “전 서규영 씨에게 돈을 빚진 적이 없어요.” “아까 박해은 씨가 박해은 씨 입으로 말했잖아요. 고태빈이 박해은 씨에게 쓴 돈 못해도 16억은 될 거라고. 그리고 고태빈이 내 예단 팔아서 유학 보내줬다면서요? 그것까지 합쳐서 딱 20억만 받을게요.” 서규영은 그렇게 말하더니 펜을 하나 꺼내 포스트잇 위에 숫자를 적은 뒤 그것을 박해은의 옷에 붙였다. “이건 내 은행 계좌예요. 3일 내로 20억 입금해요.” 박해은은 당황했다. “미쳤어요? 내가 왜 서규영 씨한테 20억을 보내야 하는데요?” “고태빈이 쓴 돈은 부부 공동재산이고 아내인 나는 내연녀에게서 그 돈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어요. 만약 협조하지 않는다면 박해은 씨를 고소한 뒤에 여론까지 끌어들여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달라고 할 거예요. 지금 해빈 테크 상장 앞둔 거 알고 있죠? 만약 고태빈이 자기 아내 몰래 내연녀한테 수십억을 썼다는 추문에 휘말린다면 과연 해빈 테크가 순조롭게 상장할 수 있을까요? 회사 상장 못 한다면 겨우 20억을 손해 보는 데서 그치지 않을 거예요.” 박해은은 서규영이 갑자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라 순간 당혹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발뺌하며 우겼다. “난 아까 농담한 것뿐이에요. 내가 태빈 오빠 돈 20억을 썼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요.” 서규영은 가방 안에서 녹음 펜을 꺼내서 눌렀고 곧이어 박해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가 태빈 오빠 옆자리 포기하지 않았으면 서규영 씨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 태빈 오빠가 규영 씨랑 결혼한 이유는 규영 씨랑 결혼하면 돈이 안 들기 때문이었어요... 그동안 태빈 오빠 저한테 16억은 족히 썼을걸요...” 박해은은 입을 떡 벌리더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서규영이 몸에 녹음 펜을 지니고 다니고, 심지어 조금 전 그들의 대화를 전부 녹음할 정도로 치밀할 줄은 몰랐다. 서규영이 말했다. “박해은 씨, 3일 줄게요. 집을 팔든, 차를 팔든, 가방을 팔든, 몸을 팔든...” “서규영 씨! 지금 저를 모욕하는 거예요?” ‘몸을 팔라니!’ 서규영은 박해은의 말을 무시했다. “3일 뒤에 20억 내 계좌로 입금해요. 입금 안 한다면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예요.” 서규영은 그렇게 말한 뒤 떠났다. 박해은은 팔짱을 두른 채로 분노 때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지금껏 서규영을 만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서규영은 고슴도치와 다름없었고 첫 만남부터 온몸에 가시를 세웠다. 20억을 입금하라니. 2억도 없는데 무슨 수로 20억을 준단 말인가? 서규영은 산후조리원에서 나오니 배가 꼬르륵거렸다. 그녀는 점심마다 직접 음식을 해서 고나율의 학교로 가져다줬었다. 얼마나 바쁜지 점심때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나율이 걔도... 참 답이 없단 말이지.’ 고태빈과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더 이상 고씨 가문 사람들의 시중을 들 필요는 없었다. 서규영은 근처 백화점에 있는 가장 비싼 일식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학창 시절, 서규영은 하루건너 그 일식집에서 밥을 먹었었는데 고태빈과 만난 뒤로는 그곳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고 고태빈의 아내가 된 뒤로는 꿈도 못 꿨다. 캐비어와 함께 청새치와 참치를 입에 넣자 혀에서 음식이 사르르 녹아내렸고, 서규영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울고 싶어졌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조용히 맛있는 음식을 즐겼다. 한 끼 식사 비용이 126만 원이었다. 카드를 긁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태빈에게서 문자가 왔다. [서규영, 굶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거야? 한 끼에 126만 원어치를 먹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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