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그런 작은 순간들이 힘든 순간을 견디던 서규영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그동안 고태빈은 서규영의 앞에서 늘 오만하고 거만했지만 서규영은 고태빈이 조금이라도 애정을 주면 그 애정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이젠 그 모든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고태빈이 오만하고 거만했던 이유는 그 상대가 서규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규영은 수도 없이 타협하고 양보해서 그의 존엄을 지켜줬지만 그건 전부 헛짓거리였다. 고태빈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서규영은 복수했다는 쾌감이 아닌 서글픔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감정에 깊이 빠져있지 않았다. 서규영이 입을 열었다. “이걸로 완전히 끝이에요.” 말을 마친 뒤에는 고태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박시형을 데리고 떠났다. 그 말에 고태빈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증오는 허망함이 되었다. 완전히 끝이라는 건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서규영의 과거, 그들이 함께했던 모든 시간과 모든 감정을 의미했다. ‘끝났다고...’ 고태빈은 고개를 돌려 서규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고태빈은 서규영이 정말로 자신을 떠났음을 비로소 체감했다. 익숙한 공포가 다시금 밀려왔다. 그 두려움에 고태빈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조차 잊었다. 박해은은 박시형과 서규영이 떠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위 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수치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수치감은 박씨 가문 족보에서 이름이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그리고 아무런 수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고태빈이 자신에게 진심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고태빈의 태도 때문에 박해은은 고태빈이 정말로 서규영을 사랑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을 한 듯했다. 박해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태빈의 팔을 잡으며 그를 일으켰다. “오빠, 어서 일어나.” 고태빈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안색이 매우 어두웠다. 고태빈의 머릿속은 조금 전 이젠 완전히 끝이라던 서규영의 단호한 모습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