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고나율이 화가 나서 욕설을 뱉으려고 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그대로 닫혀버렸다.
고나율은 씩씩대며 집으로 돌아간 뒤 장경희가 마음 아픈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아마도 주얼리들을 돌려준 일 때문인 듯했다.
“엄마, 언니가 그러던데 이 집도 언니 친정에서 해준 거라면서요? 우리한테 최대한 빨리 나가라고 하던데 그거 진짜예요?”
장경희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고나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장경희가 말했다.
“이 집 규영이 친정에서 해준 거 맞아. 하지만 규영이는 이미 네 오빠랑 결혼했고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야. 그러니까 규영이 거는 우리 거지. 걱정하지 마. 네 오빠가 그랬어. 규영이는 그냥 화가 나서 성질을 부리는 거라고. 그러니까 금방 돌아올 거야. 그리고 네 오빠가 지난번에 나한테 정남 쪽 하이스카이 별장을 보고 있다고 했어. 아마 머지않아 그곳으로 이사하게 될 거야.”
고나율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어렸다.
“하이스카이 별장이요? 거긴 도원시에서 부자인 사람들만 사는 곳이잖아요.”
고나율은 하이스카이 별장을 알고 있었다. 박유준이 바로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박유준은 박시형과 아주 가까운 친척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먼 친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나율이 박유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장경희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원에 하이스카이 별장은 그곳뿐이지.”
고나율은 매우 흥분했다. 그녀의 가장 큰 소망은 박유준과 같은 대학교에 다니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이웃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주 만나다 보면 분명히 마음이 생길 것이다.
장경희는 계속해 말했다.
“우리 가족들 모두 거기로 이사하게 되면 네 오빠랑 의논해서 이 집은 네 명의로 하자고 할게. 앞으로 너 결혼하면 이 집에서 살 수 있게 말이야.”
고나율은 장경희의 목을 끌어안았다.
“엄마, 역시 엄마가 최고예요.”
서규영은 멜밸리에서 떠나 정민서의 아파트로 향했다.
정민서는 서규영이 정말로 멜밸리를 떠나자 매우 기뻐했다.
그녀는 일찌감치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맥주까지 시켜서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
두 사람은 베란다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진짜 마음 단단히 먹은 거야?”
서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서가 말했다.
“그러면 조정이혼 해. 그러면 이혼숙려기간 단축할 수 있어. 너 마음 먹었다고 했으니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정민서는 서규영이 마음을 바꿀까 봐 걱정되었다.
서규영은 그동안 고태빈을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서규영은 정민서의 속내를 금방 꿰뚫어 보았다.
“걱정하지 마. 난 그동안 쏟은 게 있다고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비이성적인 사람은 아니야.”
서규영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으나 정민서는 지금 서규영이 얼마나 슬플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서규영은 너무도 많은 걸 희생했다.
“지난 10년이 너무 아까워. 난 아직도 네가 왜 고태빈을 좋아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 너희는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인데 말이야.”
서규영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알싸한 맛이 목구멍을 지나 위까지 전해졌지만 마음 한구석이 쿡쿡 쑤시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알잖아.”
“알지, 알지. 은혜를 몸으로 갚은 거지? 넌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잖아. 그래서 학창 시절에 한가하다고 연애 소설을 너무 많이 봐서 바보가 된 게 틀림없어.”
서규영과 고태빈은 고1, 16살에 만났다.
고태빈은 열심히 노력한 만큼 성적이 아주 좋았고, 반대로 서규영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매번 전교 1등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은 없었다.
심지어 서규영은 고태빈이 아주 차가운 성격이고 말수도 적어서 그와는 친해질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당시 서규영과 고태빈 두 사람은 과학기술원에서 주관하는 청소년 과학 인재 양성 프로젝트 드래곤 스케일 플랜에 선발됐다.
고1 겨울 방학, 두 사람은 드래곤 스케일 플랜의 겨울 캠프에 참가했다.
당시 서규영은 장난기가 많아서 금지구역인 숲으로 향했었는데 하필 그날 밤 갑자기 폭설이 쏟아졌고, 서규영은 숲에서 길을 잃은 데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폭설이 쏟아지는 날 밤, 서규영은 추위 때문에 고열을 앓아서 정신이 혼미했었다.
그런데 이대로 숲에서 얼어 죽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쯤 누군가 그녀를 찾은 뒤 그녀를 업고 숲을 빠져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고태빈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서규영의 마음속에 고태빈을 향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다툼과 갈등이 있었지만 서규영은 고1 때 폭설이 쏟아지던 그날 밤, 자신을 업고 숲을 빠져나오다가 몇 번이나 쓰러졌던 고태빈을, 어둠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던 고태빈을 생각하면서 몇 번이나 참았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늘 서규영이 양보했다.
그래서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사랑이란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서서히 닳아서 없어질 뿐이다.
서규영은 정신이 멀쩡했고 원칙적인 문제에서는 절대 타협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눈이 쏟아지던 그날, 소년의 꿋꿋했던 발걸음과 따스했던 등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렸다.
다음 날, 서규영은 아침 일찍 은행에 들렀다.
그녀에게는 카드 한 장이 있었고 그 카드 안에는 40억이 들어 있었다.
서규영은 그중 20억을 고태빈의 계좌에 입금했다.
한편, 고태빈은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던 중 휴대전화가 울리자 화면을 확인해 보았고 입금 내역 문자를 보게 되었다.
그의 계좌에 갑자기 20억이 입금되었다.
그것도 서규영의 계좌로부터 말이다.
고태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마치 승리를 거둔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성질을 내더니 결국엔 먼저 숙이고 들어오네.’
고태빈은 서규영이 이런 방식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서규영이 그동안 20억을 몰래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러나 서규영의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그렇게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서규영의 아버지는 투자회사 회장으로 어마어마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딸에게 용돈으로 20억을 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서규영이 이런 방식으로 먼저 화해를 요청했으니 고태빈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들어 서규영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서규영이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20억에 관해 묻는 대신 은근히 하대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반성했어?”
서규영은 고태빈의 말을 듣고 미간을 사정없이 구겼다.
자신을 깔보는 듯한 고태빈의 어투에 서규영은 역겨움을 느꼈고 더 이상 그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싶지 않아 곧장 본론을 꺼냈다.
“고태빈, 법원 앞에서 기다릴게. 지금 바로 법원으로 와.”
말을 마친 뒤에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고태빈은 어리둥절해졌다.
‘왜 법원으로 오라는 거지?’
그러나 고태빈은 이내 뭔가를 떠올렸다.
법원 맞은편에는 국수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서규영은 그 국수 가게의 국수를 굉장히 좋아했었고 두 사람은 대학교에 다닐 때 그 국수 가게를 자주 갔었다.
서규영은 틀림없이 그와 아침을 함께 먹으며 둘 사이의 얼어붙었던 관계를 풀고, 연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여 그의 마음을 되돌릴 생각일 것이다.
서규영이 먼저 20억을 건넸으니 고태빈은 그녀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고태빈은 차를 타고 교진 국수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서규영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고태빈은 서규영에게 다시 연락했다.
“어디야?”
서규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법원 앞에 있어.”
몸을 돌린 고태빈은 서규영의 조그만 경차를 보았다.
차를 타고 그곳으로 가서 서규영의 옆에 차를 주차해 놓으니 차이가 심했다.
고태빈이 탄 차가 롤스로이스였기 때문이다.
서규영은 그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차는 사실 서규영의 어머니가 그녀의 결혼 선물로 준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