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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자네, 이건 오늘 입을 예복일세.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오게.” 민 회장이 수행비서에게서 쇼핑백을 받아 손태하에게 건넸다. 말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 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손태하는 쇼핑백을 들고 병원 복도 끝 인적이 드문 화장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쇼핑백을 건네받고 나니 낡은 운동복 차림으로 예식을 치르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란 늘 남의 일 같았지만, 예복을 받고 나니 최소한의 예의나 격식이라도 갖추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에 들어선 그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정장 재킷도, 바지 핏도 모두 깔끔하게 떨어졌다. 손태하는 무심코 손끝으로 옷감의 질을 느껴봤다. ‘고급스러운 원단이네? 내 옷장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원단이네...’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묘해졌다. 예복 하나 갈아입었을 뿐인데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은 낯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세면대에서 물을 살짝 적셔 간단히 머리까지 손질하고 나자 어깨가 펴졌고 걷는 자세도 조금은 더 반듯해진 것 같았다. ‘옷 한 벌 바꿨을 뿐인데 기분이 이렇게 다르다니...’ “자네, 이건 오늘 입을 예복일세.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오게.” ... “어르신, 옷 갈아입고 왔습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손태하가 다시 민 회장 앞으로 돌아왔다. 검정 슈트에 흰 셔츠, 그리고 말끔한 넥타이까지 갖춘 모습은 조금 전 운동복 차림의 손태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근사하네...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 내 동생 옆에 서도 나름 잘 어울리겠네...” 민 회장은 그런 손태하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띠었다. ‘세상에, 저렇게만 꾸몄을 뿐인데... 딴사람이 됐네. 인물이 사는군, 살아.’ “지유도 지금 머리 손질 중이야. 드레스도 갈아입어야 해서 좀 걸릴 거야. 그동안 여기서 잠깐 기다리는 게 어때? 결혼 서류도 곧 도착할 테고.” “네, 어르신.” “어르신은 무슨. 이젠 좀 편하게 불러. 앞으로는 누님이라고 해도 돼.” “아, 네? 그게... 아무래도 좀...” “편하게 부르래도!” “...네, 누님...” ‘아무리 봐도 어르신 연세가 예순은 훌쩍 넘으신 것 같은데... 엄마보다도 훨씬 위인데 누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참나...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 “그래. 내 동생 지유랑 결혼하게 됐으니 나한테 누나라고 하는 게 맞지. 강요하는 건 아니니 편한 대로 해.” 민 회장은 짧게 덧붙이고는 말을 아꼈다. ‘지유 병 기운 좀 물리쳐보겠다고 돈 주고 불러온 사람일 뿐인데... 촌수는 또 왜 따지고 앉았나. 참...’ 잠시 후, 어느덧 삼십 분이 지나자, 혼인신고를 하러 구청에 다녀온다고 했던 장도훈이 서류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손태하 씨, 여기에 신분증, 그리고 혼인신고 수리 완료된 가족관계증명서가 들어 있습니다. 이제 두 분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셨어요.” “네...” 손태하는 봉투를 받아들이고 무심코 꺼내보다가 문득 한 장의 서류 앞에서 손이 멈췄다. [배우자: 양지유] 가족관계증명서 한쪽에 선명하게 적힌 이름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진짜 가족관계증명서에 배우자가 생겼네. 세상에,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 보는 여자랑 결혼을 해버릴 줄이야...’ 봉투 안에는 장 비서의 신수인지, 양지유의 증명사진 한 장도 함께 들어있었다. ‘증명사진이 이 정도면... 정말 미인이네.’ 사진 속 여자는 생각보다 훨씬 예뻤다. 단아한 이목구비에 또렷한 눈빛까지, 서른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무심코 양지유의 생년월일을 내려다봤다. ‘어머... 내 신부가 마흔둘이라고?’ 사진 속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숫자였다. 손태하는 그녀의 나이를 확인하고도 여전히 사진에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너무 예뻐서 괜히 마음이 심란해질 정도였다. ‘참... 안타깝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한 달뿐이라는 사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며, 가슴 어딘가를 조용히 두드렸다. ‘이렇게 예쁜 분이... 딱 한 달밖에 못 산다고? 이제 법적으로 내 아내라서 그런가... 괜히 마음이 복잡하네.’ 처음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저 서류 한 장에 이름 하나 올라간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직접 그녀의 이름을 보고 사진까지 마주하니 마음이 어지러웠다. 심지어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어렴풋이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중환자실 문이 열리더니, 젊은 간호사가 급히 걸어 나와 민 회장에게 말했다. “민 회장님, 신부님 준비는 다 됐습니다. 아직 의식은 없지만요.” “알겠습니다. 더 미루지 않고 시작할게요.” 손태하가 가족관계증명서를 손에 쥔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민 회장이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태하 씨, 준비됐으면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고...” “네, 누님.” 손태하는 이유 모를 무거운 마음을 안고 중환자실로 들어섰다. 민 회장과 수행원들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곳은 일반 병실과 달리 단독 사용이 가능한 넓은 ICU 병동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면에 놓인 병상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진으로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양 볼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힘없이 눈을 감은 채 간신히 숨을 쉬고는 있는 것 같았다. 바이탈 사인 모니터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삑’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수치들은 마치 손태하에게 그녀가 살아 있다고 조용히 속삭이는 듯했다. “양지유 씨...” 손태하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조심스레 흘러나왔다. ‘이분이 이제 내 아내라고?’ 그 순간, 손태하는 왠지 모를 벅찬 감정에 목이 멨다. 단지 서류 한 장, 이름 한 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막상 이렇게 눈앞에 펼쳐지고 나니, 마음속 어딘가가 묵직해졌다. 그때 민 회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철 씨, 철 씨, 시작하지. 지유가 결국 평생 혼자 지내다가 병원에서 이런 간소한 예식을 치르게 될 줄이야. 태하 씨, 어려운 결정 내려줘서 참 고마워.” “아닙니다...” 손태하는 고개를 조심스레 저으며 복잡한 심경을 꾹 눌러 삼켰다. “네, 회장님.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송지철은 예식 순서를 정리한 대본을 손에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고 손태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랑분은 이쪽으로 오셔서 신부님 곁에 앉아주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은 양옆으로 서 주시고요.” ... “신랑, 당신은 이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까?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사랑하고 돌보며 존중하고 평생 변치 않겠다고 맹세하시겠습니까?” 송지철의 차분한 음성이 병실 안에 울려 퍼졌다. 의례적인 멘트라는 걸 알면서도 손태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건 그냥 계약이야. 난 그저 돈 받은 만큼 서비스를 하는 거고... 예식이 끝나면 다시는 이 병실에 올 일도 없겠지.’ 하지만 사람들 앞에 서 있는 이상 예식의 형식은 갖춰야 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맹세합니다.” 곧이어 시선이 병상 쪽으로 향했다. “신부, 당신은 이 남성을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까?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사랑하고 돌보며 존중하고 평생 변치 않겠다고 맹세하시겠습니까?” 말이 끝났지만 병상 위의 양지유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고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송지철은 당황하지 않았다. “잘... 들었습니다. 신부께서도 분명히 마음으로 맹세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태하를 바라봤다. “이제 신랑께서는 신부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손태하는 조심스럽게 병상 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작고 가느다란 양지유의 손은 너무도 차가웠고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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