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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얼마 지나지 않아 간단한 예식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결혼식이라 해도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러진 만큼 신랑은 그저 신부의 손을 조심스레 잡는 것으로 모든 절차를 대신했다. 입맞춤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예식이 끝나자 병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하나둘 조용히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하 씨, 계좌번호 알려줘요.” “아, 네. 누님...” 미리 준비해 둔 통장과 체크카드를 꺼내 민 회장에게 건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좌에 정확히 1억 원이 입금되었다. 민 회장은 태하를 향해 담담히 말을 이었다. “태하 씨는 이제 법적으로 지유의 남편이야. 혹시 시간이 되면 한 번쯤 병문안 와줘도 좋을 것 같은데... 지유가 이틀째 의식을 못 찾고 있거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 물론 오지 않아도 괜찮아. 선택은 전적으로 태하 씨 몫이니까.” “알겠습니다.” 손태하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계약이었다. 약속됐던 돈도 무리 없이 입금됐기에 더 이상 민 회장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막연히 아내가 생겼다는 사실보다 그 아내가 곧 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1억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왔지만, 기쁨보다 먼저 떠오른 건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힘없이 감긴 두 눈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 돈이 들어온 걸 확인한 손태하는 빠르게 병원을 빠져나왔다. 이제 이곳에 더 머물 이유는 없다고 스스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의 결혼 상대인 양지유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의료진 말로는 한 달이 고작이라고 했지만, 지금 상태만 보면 그보다도 더 짧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녀가 세상을 떠난다면 손태하의 손에 쥐어지는 건 사망진단서 한 장일 뿐일 테고, 그와 동시에 이 ‘계약’은 예정대로 종료될 터였다. 이후 치러질 장례든, 그녀의 유산이든, 모두 손태하의 몫은 아니었다. 그건 계약 당시 민 회장과 분명히 정리된 부분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만에 하나 양지유가 석 달을 넘게 버틴다면 민 회장은 추가로 4억 원을 더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손태하는 마음 한편으로 은근히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혹시라도 지유 씨의 건강이 회복되면... 4억이 추가로 들어오는 거잖아? 그러면 완전 이득이지.’ 어차피 나이 차이를 극복하기도 어려울 터, 양지유가 건강을 회복한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할 건 뻔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감정 같은 건 없었다. 손태하는 그저 그녀의 병을 쫓아내기 위해 불려 온 ‘도구’였고 양지유는 손태하가 잡은 단 한 번의 동아줄에 불과했다. ... 학교로 돌아온 손태하는 부모님께 곧장 천만 원을 송금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반년 치 월급을 미리 받아서 보내드려요.” 그는 그렇게 둘러댔다. 속이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어차피 시골에 계신 부모님은 도시 생활이나 회사 구조에 대해 잘 모르시니 그가 강성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리 없었다. 손태하는 그저 그 돈으로 부모님이 병원 치료라도 제대로 받으셨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큰돈이 생겼지만 손태하는 이제 기혼자가 됐으니 주말마다 전처럼 전단지를 붙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도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무리였다. 그날 이후로 그는 모든 시간을 취업 준비에 쏟아부었다.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하루에도 몇 군데씩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러던 금요일 아침, 기숙사에서 룸메이트 윤재형이 물었다. “야, 태하야. 일자리 구하는 건 좀 어때? 오퍼 받은 데 있어?” “하아... 말도 마라.” 손태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력서는 수도 없이 넣었는데, 되는 데가 하나도 없어. 요즘 죄다 인원 감축이래. 정말 너무 어려운 상황이야.” 손태하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꿈이었다. 하지만 신입에다 경력도 없었기에 괜찮은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 윤재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태하야, 혹시 IT 쪽 유지보수는 어때? 패션 브랜드 회사 IT 부서인데 구인 공고를 올렸더라고. 개발자 업무는 아니지만, 업무 강도도 괜찮고 급여도 나쁘지 않대. 나도 어제 알게 된 거야.” 윤재형은 손태하의 룸메이트이자 속 깊은 친구였다. “오... 그 정도면 괜찮지. 나 좀 추천해 줄 수 있어?” 손태하는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뭐라도 하나 잡아야 했다. 비록 원하는 개발직은 아니지만, 일단은 어디든 들어가야 했고 경험을 쌓은 뒤 나중에 옮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연락해 볼게. 네 실력이면 충분히 합격할 거야.” 윤재형은 말만 그런 게 아니었다.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IT 부서 실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한 얼굴로 돌아왔다. “태하야, 실장님이 시간이 나는 대로 한번 들르라고 하시네. 형식적인 면접은 아니고 얼굴 보고 간단히 얘기만 나누면 된대.” “좋지! 지금이라도 준비해서 갈 수 있어.” “알겠어. 내가 한 번 더 연락해서 오전 시간 비워달라고 말씀드릴게.” 윤재형은 다시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실장에게서 긍정적인 답을 받아냈다. 손태하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기회는 잡는 사람의 것이란 말이 지금만큼 와닿은 적이 없었다. ...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손태하는 윤재형이 말해준 패션 브랜드 회사로 향했다. IT 부서 사무실로 안내받은 그는 곧 부서 실장을 만났다. 면접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실장은 손태하의 실력과 성실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곧바로 인사팀과 급여, 근무 조건 등을 조율하는 절차로 이어졌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고 손태하는 그 자리에서 채용 확정을 받았다.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덧 오전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며칠간 이력서를 돌리며 고군분투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기회를 붙잡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하늘이 내려준 복권 같은 내 아내는 지금쯤 상태가 어떨까? 호전됐으려나?’ 손태하는 문득 법적으로 자신의 아내가 된 양지유가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 감긴 눈, 가는 숨결도 다시금 또렷하게 떠올랐다. ‘한 번 가보자. 어차피 내 아내인데, 한 번쯤 보는 게 이상하진 않겠지.’ 물론 이 결혼이 어디까지나 ‘거래’였지만, 어쨌든 법적으로는 그녀의 남편인 만큼 한 번쯤 얼굴을 보러 가는 게 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병원 위치를 검색해 봤더니 병원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버스로 겨우 세 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지금 가자. 면회 시간이 맞을지 모르지만 일단 가서 보지 뭐.’ 그는 말 그대로 바로 움직였고 버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환자실 복도까지 올라간 손태하는 문 앞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면회 시간은 오후 3시부터 3시 30분까지입니다.] 그러고 보니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 모르지. 그냥 한번 시도해 보자. 들키면 나가면 되는 거고. 어차피 입구도 막혀 있는 것도 아닌데. 간간이 드나드는 간호사들 사이에 슬쩍 끼면 들어갈 수도 있지 않겠어?’ 손태하가 문 앞에 서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왔다. “저... 6번 병실 환자 보호자인데요. 잠깐 면회 좀 가능할까 해서요...” “6번 병실이요? 아직 면회 시간 전인데... 보호자세요?” “네, 맞습니다.” 간호사는 그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손태하 씨 맞으세요?” “네! 맞아요! 제가 손태하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낯선 간호사에 손태하는 순간 멍해졌다. ‘뭐야? 내가 그렇게 유명해진 건가... 처음 보는 간호사도 나를 알고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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