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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민 회장과의 통화를 마친 뒤, 손태하는 잠시 쉬고 싶던 마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미 약속한 일이니, 차라리 조금이라도 일찍 다녀오는 게 낫겠다 싶었다. ‘지유 씨에게 다시 오겠다고 한 이상,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그는 대충 옷매무시를 정리하고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 오후 세 시 반, 손태하는 다시 6번 중환자실을 찾아갔다. 양지유의 상황이 특별한 만큼 보호자인 그의 출입은 언제든 허용되었다. “안녕하세요, 또 아내 보러 오셨어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지난번에 봤던 간호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하하...” 손태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무 살 갓 넘은 청년이, 혼수상태에 빠진 중년 여자를 ‘여보’라 부르며 드나드는 모습은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아마 병원 사람들 사이에도 이미 다 퍼졌겠지. 내가 환자를 살리겠다고 데려온... 그야말로 제물 같은 어린 신랑이라는 소문쯤은.’ “그럼 두 분 얘기 나누세요.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호출 버튼 누르시고요.” “감사합니다, 간호사 선생님.” 간호사는 미소를 지으며 병실을 나섰다. 손태하는 조용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양지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여보, 나 왔어.” 그의 손끝에 닿은 그녀의 손은 전보다 조금 따뜻해져 있었다. 처음 병실에 왔을 땐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손이었지만 지금은 미세한 온기가 느껴졌다. “여보, 나 안 보고 싶었어?” “사실 말이야... 난 병을 쫓아내고 당신을 살리기 위해 데려온 제물 같은 신랑이래. 민 회장님이 그러셨어. 혹시라도 기적이 생길까 싶으니 당신 곁에 있어 주라고.” 말을 이어가던 손태하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끝은 천천히 팔을 타고 올라갔다.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이번에는 분명히 그의 손을 아주 약한 힘으로 감싸 쥐었다. “지금... 손... 움직였지? 정말 대단해. 계속 힘을 내줘.” 그는 놀라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감싸며 다독였다. 어깨까지 닿았을 때 앙상하게 마른 뼈가 손끝에 느껴지자, 손태하는 순간 마음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무의식중에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손태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처음엔 단지 돈을 좇아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단순한 대역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분명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였고 그는 그 곁에 놓인 제물 같은 어린 신랑이었지만, 그 이상을 자꾸 바라보게 되었다. 말도 없고 대답도 없는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게 안쓰러움이든 책임감이든 아니면 아주 작게 피어나는 무언가든 간에...’ “여보, 얼굴 좀 만져봐도 돼? 진짜 예쁘다... 여기가 병원이 아니었으면 아마 못 참고 키스했을 거야. 결혼식 날도 뽀뽀 한 번 못 했잖아.” “대답 없으면 동의한 걸로 알게?” 손태하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손바닥만 한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지만 손끝에 닿는 그 감촉이 이상하게 자꾸 마음을 흔들었다. “여보, 빈말이 아니라 진짜 예뻐서 그래. 얼른 깨어나. 다 나으면 내가 매일 밥 해줄게. 민 회장님 말씀으론 당신... 결혼해 본 적 없다며. 이렇게 예쁜 누나랑 내가 결혼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나 진짜 운 좋은 사람인가 봐.” 그녀의 뺨을 쓰다듬던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볼살 하나 없는 마른 얼굴인데도 어쩐지 그 느낌이 부드럽고 편안했다. 그러던 중, 계속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또 한 번의 반응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손가락에 아주 약하게나마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잡았다. ‘진짜네... 방금 또 움직였어. 손에도 온기도 도는 것 같고... 대화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반응이 오다니.’ 그녀의 손에 잠깐이나마 힘이 실렸다는 사실에 손태하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여보, 잘하고 있어. 우리 계속해 보자. 진짜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작은 반응 하나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의료진 말처럼 정말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거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의식을 되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4억 원의 보상도 현실이 될 거야. 물론 그녀가 깨어나는 순간 이 결혼도 끝이 나겠지...’ 손태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크게 미련은 없을 거야.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였으니까... 연상도 나쁘지 않지만, 억지로 인연을 이어갈 순 없잖아.’ “끼익...” 양지유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던 손태하는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거뒀다. 누가 봐도 오해할 소지가 있어 보이는 장면이었다. ‘괜한 오해를 사느니 차라리 들키지 않는 게 나을 거야.’ 뒤를 돌아보니 문을 연 사람은 지난번 그 간호사였고 그 뒤로 민 회장도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태하 씨,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누님, 별말씀을요...” 둘이 인사를 나누던 찰나, 간호사가 모니터를 흘끗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어머... 당직 선생님 불러올게요!” 병실 문이 닫히자, 간호사의 목소리가 복도 너머로 작게 들렸다. “와... 진짜 의외네. 제물 노릇을 이렇게 프로답게 해내다니.” “...” 손태하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사 선생님도 환자와 자주 대화하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지유 씨가 석 달만 더 버텨주면 제게는 4억 원의 보상도 따르고요.” 그는 가볍게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 속에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섞여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민 회장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에게도 존댓말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이 일은 처음부터 계약이었으니까요.” 민 회장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부담스러워진 건가?” 손태하는 평정심을 되찾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을 원만히 마무리하려면 연기와 현실은 분명히 구분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외부의 시선을 고려해 회장님을 ‘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먼저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것 또한 계약 이행에 해당하니까요.” 솔직히 말해 하늘에서 떨어진 복권 같은 아내와 사랑이라도 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딘가 형체 없는 책임 같은 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미 부부라는 이름을 나눈 사이니까.딱 잘라 이유를 대라면 4억이라는 숫자가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 되겠네.’ “그래요. 태하 씨. 그 돈은 저한텐 큰돈 아니에요.” 민 회장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사실 지유한테 제물 같은 어린 신랑을 붙여준 것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곁에 누군가 있어 줬으면 해서였어요. 마음만은 덜 외롭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녀는 잠시 태하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태하 씨, 계속 손잡고 있어도 괜찮아요. 난 신경 안 쓰니까 놓지 말아요.” 민 회장의 말을 들으며 손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양지유의 손을 놓았다. 그 모습을 본 민 회장은 다급히 손짓을 보냈다. 그 손짓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양지유는 마흔이 넘도록 결혼은커녕 진지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와서야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저 이렇게 잘생긴 청년이라도 곁에 있어 주면 네 마음이 조금은 덜 쓸쓸하지 않을까 싶었어. 가여운 지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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