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괜찮아요. 너무 조심스러워하지 말고 조금 더 용기 내봐요. 가능하다면 지유한테 가볍게 입맞춤해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 두 사람은 법적으로도 부부니까요.”
민 회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손태하가 조금은 더 다가가 주길 바라고 있었다.
‘지유가 생의 끝자락에서라도 남자의 따뜻함을 한 번쯤은 느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짧은 인연이지만, 태하 씨 같이 잘생긴 청년이라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누님...”
손태하는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봤자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한테 내가 뭘 더 해줄 수 있겠어. 뺨에 가볍게 입 맞추는 정도는 괜찮겠지. 하지만 그 이상을 바란다고 해도 그건 무리지. 의식을 되찾고 병상에서 일어난다면 모를까.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리고 지유 씨가 원한다면 기꺼이 한 몸 바쳐 그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할까?’
의료진마저 두 손을 놓은 상황에서 기적 같은 회복을 바라는 건 어쩌면 너무 큰 욕심일지도 몰랐다.
“태하 씨, 정말 고마워요. 난 이만 가볼게요. 오붓한 시간 보내요. 이 늙은이가 눈치 없이 오래 있으면 안 되잖아요?”
손태하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지자, 민 회장은 안도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섰다.
들어온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방문이었다.
이윽고 병실 안에는 다시 손태하와 양지유 둘만 남게 되었다.
“여보, 그 민 회장님... 친언니는 아니지? 성도 다르던데. 방금 다녀가셨어. 다시 우리 둘만 남았네.”
손태하는 양지유의 손을 살며시 잡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의사가 말한 대로 그녀와의 대화가 의식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진심을 다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내가 느끼는 게 어떤 감정이든 지금은 그저 배우가 되는 거야. 지유 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이 역할에 몰입하는 거지. 어쩌면 그게 정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여보, ‘자기야’라고 불러도 될까? 사실 그렇게 부르고 싶었어. 당신은 내 사랑스러운 아내니까.”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손태하의 얼굴에는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에는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어색했지만, 그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기야?”
그 순간, 잡고 있던 양지유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하더니 지난번보다도 더 또렷하게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손에는 전보다 확연히 온기가 돌고 있었다.
“자기야, 내 목소리 들려? 곧 깨어날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더 힘내자. 우리 자기, 참 씩씩하고 예쁘다.”
손태하는 살짝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볼에 손을 올렸다.
‘이건...’
어느새 양 볼에도 희미하게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며칠 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살짝 상기된 듯한 그녀의 얼굴은 핑크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설마 이런 말들이 지유 씨의 마음을 움직인 건가? 그동안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봤다고 했었지. 처음 들어보는 말, 처음 받아보는 사랑이라서 그런 건가?’
사실 손태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껏 어떤 여자에게도 이렇게 애정 어린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어색하고 더 낯설었지만, 그와 동시에 진심이었다.
“자기가 지금 깨어난다면 정말 꼭 안아주고 싶어.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키스할 거야.”
그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다 조심스럽게 손끝을 입술과 쇄골로 옮겼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고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똑똑똑... 끼익...”
문 두드리는 소리에 손태하는 깜짝 놀라 방금까지 양지유의 쇄골을 어루만지던 손을 재빨리 거두었다.
‘아무래도 이런 스킨십은 둘만 있을 때 조용히 해야겠지. 누가 보면 괜히 민망하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처음 보는 간호사였다.
“안녕하세요. 손태하 씨 맞으시죠?”
“네, 간호사 선생님. 제가 손태하입니다. 제 아내가...”
손태하는 멋쩍게 웃으며 양지유가 꼭 잡은 자기 손을 가리켰다.
“환자분이 손을 잡고 계시네요? 심박수도 눈에 띄게 올라갔어요. 체온도 한 번 재볼게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간호사의 손놀림은 노련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모니터를 살핀 뒤 바로 체온계를 가지러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는 다시 병실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양지유의 체온을 측정했다.
“좋네요. 전체적으로 바이탈 사인이 확실히 안정되고 있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간호사 선생님, 혹시 제 아내한테 비타민 주사 같은 수액을 조금 더 보충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영양을 많이 공급하면 회복이 더 빠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씀이세요. 이따가 당직 의사 선생님께 여쭤볼게요. 그것보다 환자분이 깨어나서 식사만 하실 수 있어도 회복 속도가 훨씬 빨라질 거예요.”
“네, 제가 꼭 깨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손태하가 간호사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양지유는 계속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비록 힘은 약했지만 분명히 의식이 돌아오고 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간호사는 기본적인 검사를 마친 뒤 조용히 나갔다.
...
손태하는 다시 양지유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듯 그는 다정한 말투로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도 자신이 하는 말들이 얼마나 오글거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말들을 할수록 양지유는 더 큰 반응을 보였다.
이어서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살짝 상기된 얼굴, 따뜻해진 체온, 그리고 미세하게 힘이 실린 손가락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몸 어딘가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끝이 입술에서 쇄골까지 내려갈 때 그녀의 숨결은 계속해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손태하는 쇄골까지 닿았을 때 손을 떼었다.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반응은 기뻐서일까, 아니면 불편하다는 뜻일까... 스물두 살짜리 남자애가 여보라고 부르고 아무렇지 않게 스킨십을 하는 걸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잖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성향에 따라 누군가는 이 상황을 즐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몹시 당황스러워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양지유는 평생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었다던 민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곱씹다 보니, 혹시 양지유가 남자 자체에 큰 흥미가 없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스쳤다.
잠시 침묵을 삼킨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여보,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 이렇게 자꾸 말 걸어주는 게 당신의 건강 회복에 좋다고... 근데 난 무슨 얘길 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어. 혹시 내가 뭔가 기분 상하게 했다면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 그리고 내가 하는 말들은 다 진심이야. 앞으로도 진심일 거고. 나도 말이지... 여태껏 진지하게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었거든.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갑자기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그는 다시 양지유의 손을 꼭 잡았다.
“진짜야... 나는 자기가 눈을 떴으면 좋겠어. 그리고 꼭 안아주고 싶고... 부드럽게 키스하고 싶어...”
익숙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에 담긴 감정만큼은 점점 더 진심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게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그저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감정인지, 이제는 그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