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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어느새 오후 다섯 시가 되었다. “자기야, 벌써 오후 다섯 시네? 나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해. 내일 오전에 다시 올게. 기다릴 수 있지? 나 없는 동안에도 힘내고 내일 다시 왔을 때는 눈 뜬 모습 보여줘. 응?” 손태하는 조심스럽게 양지유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며 속삭였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학교까지 가는 데도 한 시간은 걸리니까 이제 슬슬 가야 하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네... 내일 아침 먹고 바로 다시 병원으로 와야겠어.’ ...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다. 손태하는 틈만 나면 병원에 들렀고 올 때마다 어김없이 양지유의 손을 잡고 혼잣말하듯 이야기를 건넸다.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장난기 어린 말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신기하게도 그의 말 한마디, 손길 하나에 반응하듯 양지유의 바이탈 수치는 눈에 띄게 호전되고 있었다. 정말이지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손태하가 조심스레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가가면 양지유의 볼에는 은은한 홍조가 스며들었다. 조금 더 짓궂고 능청스럽게 낯간지러운 말을 건넬 때면 그녀는 놀랍게도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움켜쥐곤 했다. 어느덧 학교를 떠날 날이 다가왔고 기숙사에 살던 학생들도 하나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점심 무렵, 병원에서 막 돌아온 손태하가 기숙사 방에 들어서자 윤재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태하야, 이제 슬슬 기숙사도 빼야 하잖아. 혹시 방 구할 생각 있어? 우리 그냥 같이 자취할까?” 같은 회사에 입사하게 된 윤재형이 먼저 제안했다.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어. 빨리 알아보는 게 좋겠지? 지금 졸업 시즌이라 방 구하기 쉽지 않을 거야. 월세도 많이 올랐을 테고. 우리 회사 근처에서 찾아볼까? 출퇴근하기 편하잖아.” “야, 거긴 번화가 한복판이잖아. 월세라고 우리 같은 신입 월급으로는 절대 집을 구할 수 없을걸...” 윤재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제로 회사 주변은 온통 오피스텔이나 상가 건물뿐이라 마땅한 주거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빌라라고 해도 죄다 비쌌고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 둘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일단 찾아볼게.” 손태하는 말이 나온 김에 휴대폰을 꺼내 병원과 회사 사이 인근 지역의 매물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요즘 양지유는 바이탈도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겉보기에는 회복세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좀처럼 깨어나지 않자, 의사들은 원인이 단순히 신체적인 문제는 아닐 거라는 소견을 내놓았다. 주치의 안정원 교수는 환자 스스로 마음 깊은 곳에서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뒤로 손태하는 하루라도 더 병원에 들러 그녀 곁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야, 회사 근처 싹 다 뒤져봤는데... 그나마 괜찮고 가까운 데가 하늘 아파트네? 신축은 아니긴 한데... 가격은 괜찮아.” “뭐라고? 하늘 아파트?” 손태하는 아파트 이름을 다시 물으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맞아, 하늘 아파트. 어떤지 직접 찾아봐봐.” “오케이, 나도 한 번 찾아볼게.” 손태하는 자취방 앱을 열어 ‘하늘 아파트’를 검색했다. 월세방도 있고 전세 매물도 있었는데 확실히 시세보다 저렴한 편이었다. “여기 괜찮은데? 우리 그냥 원룸 하나 잡고 같이 지내자. 부동산에 잘 말하면 침대 두 개도 넣어줄걸?” 그곳이 병원과 가까운 위치라는 걸 확인한 순간 손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지유를 보러 다니기에 충분히 부담 없는 거리였다. “좋다. 회사에서도 멀지 않고.” 윤재형도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어차피 회사는 정해졌고 기숙사도 곧 비워야 하니 빨리 방을 구하는 게 맞았다.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보러 갈까?” “그러자.” 두 사람은 간단히 짐을 챙겨 학교를 나섰고 하늘 아파트로 향하는 버스 번호를 검색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근처 부동산에 연락해 방을 보여달라고 약속도 잡았다. ... 두 사람은 예상보다 순조롭게 방을 구했다. 단지 내에서 두 군데를 둘러본 끝에 비교적 넓은 원룸 하나에 마음이 갔다. 그리고 곧장 인근 중개사무소로 이동해 계약까지 마쳤다. 집주인은 오후 중으로 기존 킹사이즈 침대를 싱글침대 두 개로 바꿔주기로 했고 내일이면 바로 입주할 수 있었다. “재형아, 난 병원 좀 들러야 해서. 너 먼저 학교 들어가 있어.” “야, 근데 너 요즘 왜 그렇게 자주 병원에 들락거려? 짙은 소독약 냄새가 빠질 기미가 없더라. 설마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거야?” “뭐래, 너 상상력은 여전하네? 모레부터 회사 출근인데 내가 뭔 알바를 해.” “그럼 같이 가줄까? 누군데 그렇게 정성을 다해? 되게 중요한 사람이야?” “아... 그냥 고향에서 올라온 친척분이야. 간간이 들러서 돌보는 중이지 뭐. 피곤하긴 해도... 어쩔 수 없지.” 손태하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은 몰래 결혼했고... 아내가 지금 식물인간처럼 병상에 누워 있다고 어떻게 말하겠냐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아, 그렇구나. 알겠어. 그럼 난 먼저 학교로 들어갈게. 내일 아침에 같이 이사하자.” “응, 그래. 조심히 들어가.” 손태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윤재형은 손을 흔들며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 하늘 아파트를 나선 손태하는 정류장에서 곧장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한 시간은 오후 세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방을 구하느라 조금 늦었지만 마음은 하루 종일 병원에 와 있었다. “여보, 오늘 기숙사 룸메이트랑 같이 살 원룸 계약했어. 아파트 단지 이름이 ‘하늘 아파트’더라. 뭔가 예쁘지 않아? 왠지 내 이름과도 어울리는 느낌이야. 좋은 출발이 될 것 같아. 여보, 내가 꼭 성공해서 좋은 남편이 되어줄게.” 손태하는 그렇게 말하며 지유의 작은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녀의 볼에는 어김없이 붉은 기운이 스며들었고 손끝에도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자기야, 앞으로는 자기를 부를 때 ‘지유야’라고 이름을 부르는 건 어때? 연하남의 귀여운 도발이라고나 할까?” 손태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지유 자기’는 어때? 사랑스러운 애칭 같잖아...” 병상 머리맡에 기댄 채, 손태하가 장난기 섞인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양지유의 손가락이 또다시 살짝 움직였고 이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똑똑똑...” 손태하가 양지유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려던 찰나,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간호사 낯선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여자는 서른쯤 되어 보였고 단정한 분위기 속에 어딘가 온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환자분의 지인께서 찾아오셨어요. 두 분 얘기 나누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간호사 선생님.” 손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호사를 향해 인사한 뒤, 다시 양지유의 손을 꼭 잡은 채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두 분... 결혼하신 거예요?” 손태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자연스레 웃으며 답했다. “네, 제가 지유 씨의 남편입니다. 혹시 지유 씨 친구분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대답했다. “네... 지유랑은... 정말 오래된 친구입니다.” 그 눈빛에는 반가움도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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