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나는 다시 태어났다.
지난 생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용병이었던 나는 이번 생에는 매일 청루를 드나드는 무능력하고 방탕한 황자가 되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오래전에 태자비로 내정된 정승의 딸이 나와 같은 침상에 누워있는 걸 보게 되었다.
이것이 음모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용기 내어 황제에게 정승의 딸과의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과 내통하여 역모를 꾀하려고 했다고 모함당하는 바람에 변방으로 내쫓겼다.
형제라는 작자들이 음험한 수를 쓰며 나를 황위 다툼에 끌어들이려고 하니 그들과 끝까지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의 황제는 내가 될 것이다.
...
잠결에 주석호는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여인의 가냘픈 신음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몸은 마치 보드라운 구름 속에 파묻힌 것 같았고 또 따뜻하면서도 매끄러운 것이 끊임없이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남카프리아의 열대우림에서 총을 맞고 죽었었는데?’
주석호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작은 손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여인은 주석호의 귓가에 대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면서 부드러운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너... 너무 괴로워요...”
더는 말을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자신과 함께 있는 이 여인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주석호는 마치 본능처럼 여인과 엉겨붙었다.
...
날이 밝았다.
주석호는 천천히 눈을 뜬 뒤 쓴웃음을 지었다.
어젯밤 일어난 일들이 꿈만 같았으나 머릿속에 갑자기 생겨난 십여 년의 낯선 기억들이 가짜일 리는 없었다.
환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일이 그에게 일어나다니.
1년 356일, 생과 삶의 기로에서 죽음과 싸워야 하는 세계적인 용병인 주석호는 낯선 시대, 낯선 나라 북양의 육황자가 되었다.
비록 육황자이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좋은 신분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주석호는 품 안의 여인이 꿈틀대는 걸 느꼈다.
주석호는 고개를 숙여 여인을 보았다. 어젯밤에는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그동안 수많은 미인을 보아온 주석호조차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의 엄청난 미인이었다.
여인은 주석호의 가슴 위에 엎드려 있었다.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그녀는 희고 가는 손목을 주석호의 목 언저리에 올려두고 있었다.
화려한 색감의 비단 이불을 덮고 있어 아래 몸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은근히 보이는 굴곡만으로도 주석호는 체내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다시 위를 바라보니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사람을 홀릴 듯한 예쁘장한 얼굴이 보였다.
입매는 조각달처럼 살짝 휘어져 있었는데 어젯밤 주석호의 발칙한 행위 때문인지 입술이 유독 붉고 반지르르했다.
여인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고 그녀의 질끈 감은 두 눈과 함께 긴 속눈썹이 눈에 띄었다.
여인은 마치 수채화와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물처럼 부드러워 보여 주석호는 잠깐이지만 넋을 놓았다.
주석호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것일까?
여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하고 맑은 눈동자였지만 주석호를 보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윽!”
여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서 다시 힘없이 주석호의 몸 위로 쓰러졌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처음이라 통증이 상당할 테니 며칠 푹 쉬거라.”
머릿속에 남아있는 육황자의 기억 때문인지 주석호는 상당히 예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주석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품속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또 한 번 피가 들끓는 것만 같았다.
“이... 이 난봉꾼 같으니라고! 다른 사람이 위급한 틈을 타 이런 짓을 하다니, 호색한이 따로 없군!”
여인은 빨간 입술을 깨물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녀는 주석호의 파렴치한 손길을 피하면서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본궁은 어젯밤 만질 수 있는 곳은 다 만졌고 즐길 수 있는 것도 다 즐겼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엇을 더 가리려는 것이냐?”
주석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본궁?”
여인의 안색이 살짝 달라졌다. 그녀는 이내 차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황자 전하셨군요. 황실의 일원이면서 민가의 여인을 겁탈하시다니요.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렵지 않습니까?”
여인이 굽신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굴자 주석호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주석호는 어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어젯밤 주석호는 취선루에서 술을 마시다가 진탕 취해서는 은자를 꺼내 들며 취선루의 주인장에게 자신과 함께 하룻밤을 보낼 아리따운 여인을 데려오라고 했다.
사실 주석호는 황자였지만 황제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그는 조정의 일에 끼어들 수 없는 처지였을 뿐만 아니라 궁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냉대를 당했기에 하루건너 청루를 드나들며 주색을 즐겼다.
그러나 과하게 흥분했던 탓인지, 아니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죽은 것인지 주석호의 영혼이 이 몸에 깃들게 되었다.
“하하, 흥미롭구나.”
주석호는 웃으며 말했다.
“청루의 여인치고는 꽤 당돌하구나. 하지만 그런 절개가 있다고 한들 네가 뭘 어쩔 수 있겠느냐?”
주석호는 침상에서 일어나 태연한 얼굴로 당당하게 자신의 나신을 드러냈다.
그의 뒤에 있던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두 눈을 가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 황실의 일원으로서 어찌 그렇게 저속한 말을 입에 담는단 말입니까? 게다가 제 순결을 짓밟은 것으로도 모자라 저를 모욕하시다니요? 정... 정말 북양 황실의 수치로군요!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됐다. 그만 얘기하거라. 결국엔 은자를 많이 챙겨달라는 것 아니냐?”
주석호는 성가시다는 듯이 옷을 입으면서 은자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침상 위에 던졌다.
주머니 안에서 은자들이 절그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수백 냥은 될 듯했다.
“가져가거라. 그 정도면 네 몸값을 치러 이 청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너의 첫날밤을 산 대가로 치겠다. 그러면 난 이만 가보마.”
말을 마친 뒤에는 바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발을 내딛자마자 뒤에서 갑자기 억눌린 흐느낌이 들려왔다.
주석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옛 여인들은 너무 성가셨다.
몸을 돌린 주석호는 여인이 은비녀를 손에 들고 자신의 목을 찌르려고 하는 걸 보았다.
“망할!”
주석호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본능적으로 여인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목을 힘주어 꽉 잡았다.
은비녀의 끝부분이 살갗을 살짝 파고들었다. 희고 가는 목 위에서 붉은 피가 퐁퐁 솟더니 은비녀를 따라 흘러내려 침상 위 붉은 흔적들과 한데 섞였다.
“이럴 필요가 있느냐?”
주석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나와 혼인할 생각은 아니겠지? 내가 어찌 청루 출신의 여인과 혼인하겠느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인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차갑게 웃었다.
“비열하고 파렴치한 전하는 저와 혼인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만하거라!”
주석호는 여인에게서 은비녀를 빼앗은 뒤 그것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런데 비녀 위에 아주 작게 ‘옥’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옥? 이게 네 이름이더냐?”
여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주석호를 노려볼 뿐이었다.
“돌려주십시오. 전하 같은 사람에게 제 순결을 빼앗겼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
주석호는 눈알을 굴리더니 뭔가를 떠올리고는 여인의 몸 위로 올라타면서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 본궁은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 어차피 죽을 작정이라면... 나를 조금 더 만족시켜 준 뒤 죽거라.”
“정... 정말 금수만도 못하군요!”
여인은 저항하려고 했으나 힘으로는 주석호를 이길 수가 없었다.
비록 이 몸의 원래 주인은 거의 매일 청루를 드나들며 주색을 즐기느라 몸이 상당히 허약했으나 주석호는 여전히 전투 본능이 남아있는 데다가 반사신경도 좋아 여인에게 비녀를 빼앗을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주석호는 한 손으로 여인을 제압하고 다른 손으로는 비녀를 돌렸다.
그는 덤덤히 말했다.
“만약 나를 증오하고 원망한다면 나를 죽이러 오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나약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만약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온 도성의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다. 그러면 너는 죽어서도 나에게 순결을 빼앗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라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겠지. 그리고 나 정도 지위면 네 신분을 조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이... 이...”
여인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고 눈꼬리가 붉어졌다.
그녀의 가냘픈 몸이 형편없이 떨렸다. 마치 겁을 먹은 나약한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됐다. 이 흉기는 증거이니 내가 챙겨갈 것이다.”
주석호는 일어나면서 손에 힘을 풀었고 여인은 완전히 녹초가 된 채로 침상 위에 누웠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날 죽이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하지만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온 도성에 알릴 것이다.”
말을 마친 뒤 주석호는 은비녀를 챙겨서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갔다.
주석호 뒤에 있던 여인은 빠르게 사라지는 주석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치욕과 분노로 가득 찬 그녀의 눈동자에서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