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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튿날 아침. 임윤슬은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은 뒤 김옥순의 집에 들러 장작 패는 도구를 빌려 산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산소 앞에 도착해 잡초를 베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윤슬아, 아침 일찍 할아버지 뵈러 왔구나. 어젯밤에 아버지한테 네가 돌아왔다고 들었어. 이번에도 선물 사 왔더라. 매번 정말 고마워.” 고개를 들어보니 이웃 오춘영 할머니 댁의 명일 오빠가 집에서 기른 채소 바구니를 한가득 짊어진 채로 서 있었다. 임윤슬은 그런 그를 보며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명일 오빠야말로 부지런하시네요. 벌써 채소를 다 베어 오셨잖아요.” “이게 금방금방 자라서 다 못 먹거든. 네 언니 말로는 잘라서 장터에 내다 팔자네.” 명일은 임윤슬 손에 칼이 있는 걸 보고는 황급히 말했다. “그건 이리 줘. 내가 할 테니까 넌 쉬고 있어.” “괜찮아요, 오빠. 저 혼자 천천히 하면 돼요. 바쁘실 텐데 돌아가 보세요.” “여자가 그런 걸 들고 있으면 위험해. 내가 할 테니까 넌 옆에 앉아 있어.” 그는 단호하게 칼을 받아들고는 허리를 숙여 잡초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임윤슬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어제 아버지가 그러는데, 오늘 상이도 돌아온대. 너희 둘 몇 년 만이야? 매번 올 때마다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만났잖아. 오늘은 안 갈 거지? 안 가면 둘이 마주칠 수 있겠다.” 명일의 입에서 나온 ‘상이'의 본명은 임상이로 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합격한 인물이고 그것도 그 유명한 경태대학교였다. “상이 오빠도 왔다고요? 정말 오래 못 봤네요. 대학 간 뒤로 쭉 못 본 것 같아요. 그 뒤로 전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여기저기 돌아다녔거든요.” “그러게. 벌써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3년이야. 넌 시집도 갔고.” “상이 오빠는 잘 지내죠?” “잘 지내지.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직접 회사를 차렸는데 꽤 잘 됐어. 이번에 돌아온 건 마을 이장님이랑 관광 개발 건을 상의하려는 거래.” “잘됐네요. 그럼 앞으로 마을 사람들도 돈을 벌 수 있고 생활도 나아지겠어요. 역시 상이 오빠는 대단해요.” “맞아. 예전에도 마을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 너랑 상이였잖아. 네 할아버지 병만 아니었어도 넌 예정대로 수능을 봤을 테고 아마 같은 대학교에 갔을 거야. 우린 다들 너랑 상이가 잘 돼서 나중에 결혼할 줄 알았어.” “그럴 리가요. 상이 오빠는 오빠처럼 그냥 제게 아주 좋은 오빠인걸요. 두 분 다 저랑 할아버지를 많이 챙겨주셨잖아요. 전 지금 결혼도 했고 상이 오빠도 자기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임윤슬은 줄곧 임상이를 친오빠처럼 여겼다. 그는 언제나 주머니 속에서 맛있는 걸 꺼내 임윤슬에게 주곤 했고 임윤슬은 그를 할아버지처럼 똑같이 가족으로 여겼다. 명일이도 임윤슬이 이미 결혼했다는 걸 알았기에 임상이와 더는 인연이 없음을 깨닫고 더 말하지 않았다. 잡초가 거의 다 정리되자 그는 칼을 임윤슬에게 건넸다. “다 됐다. 윤슬아, 칼은 네가 가져가.” “고생 많았어요, 오빠. 이제 가보셔도 돼요. 저는 이걸 씻어서 옥순 할머니께 돌려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난 먼저 갈게. 혼자 조심해야 해. 다음에는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어.” “네, 좋아요.” 명일이 떠난 후 임윤슬은 칼을 들고 냇가로 다가가 깨끗하게 씻은 뒤 손의 물기를 털었다. 막 일어나자 아까 명일이 언급했던 인물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바람막이를 입은 키가 큰 남자. 그동안 못 본 사이에 임상이도 훤칠하게 변해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임윤슬은 반가움에 인사했다. “상이 오빠, 돌아오셨네요? 방금 명일 오빠한테 오늘 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임상이를 보니 임윤슬은 감격스러웠다. “응. 아침에 도착했어. 지금은 나와서 좀 걷고 있고.” 사실 임상이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임윤슬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짐만 내려놓고 임윤슬의 집으로 갔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이지 않자 돌아오던 길에 명일을 만나 임윤슬이 냇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온 것이다. “명일 오빠가 그러던데 오빠가 창업해서 마을 관광 개발도 한다면서요. 역시 대단해요.” 임윤슬은 진심으로 임상이를, 또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뻐했다. “작은 회사를 차렸는데 마침 경태시에 친구가 관광 쪽에 투자하고 싶다고 해서. 이번에 마을로 온 것도 개발을 상의하러 온 거야.”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상이 오빠는 대단해요. 창업이 많이 힘들죠?” 임윤슬은 문득 공지한이 떠올랐다. 가끔 한밤중에 깨어나도 공지한은 늘 서재에서 일하고 있었다. “응. 처음에는 그랬지. 전에 들으니 네가 결혼했다던데 남편도 대단하다면서?” 임상이는 결국 말을 꺼내고 말았다. 임윤슬의 입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네. 3년 전에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결혼했어요. 제 남편도 오빠처럼 창업했고요.” “윤슬아, 그 사람이 너한테 잘해줘?” “오빠, 지한 씨는 저한테 정말 잘해줘요. 지금도 너무 행복해요. 오빠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임윤슬은 걸음을 멈추고 진지한 눈빛으로 임상이를 보며 말했다. “응. 우리 윤슬이가 벌써 다 커서 가정도 꾸렸네. 네가 행복하다니 오빠도 안심이야. 오빠도 분명 행복해질 거야. 결혼식은 안 했다지? 할 때 연락해. 내가 축의금 보내줄게.” 임상이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임윤슬의 맑은 눈을 보니 그때 자신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오빠, 오빠'라고 부르던 그 소녀를 놓쳐버렸음을 실감했다. 이번 만남으로 임상이는 결심했다. 다시 임윤슬의 가족 같은 오빠로 남기로. 임윤슬이 행복하다면 영원히 오빠로만 있어도 괜찮았다. 임상이의 말을 들은 임윤슬도 마음이 놓였다. 그녀의 마음은 처음 공지한을 만났을 때 이미 공지한에게 가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임상이는 그저 가족 같은 오빠일 뿐이다. 어린 시절 함께 자란 동생으로서 임윤슬은 진심으로 오빠가 평생을 함께할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길 바랐다.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임윤슬의 집 앞에 다다랐다. “상이 오빠, 다 왔네요. 점심은 우리 집에서 같이 드실래요?” 임윤슬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니, 이따가 이장님 만나야 해.” 임윤슬은 임상이에게 할 일이 있다는 걸 알기에 더 붙잡지 않았다. 어차피 며칠은 더 머물 예정이라 내일 초대해도 되었으니까. “네, 오빠. 그럼 내일은 꼭 오세요. 바쁘신데 얼른 가보세요.” “알았어. 내일 올게. 얼른 들어가.” 임상이가 약속하자 임윤슬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임윤슬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지켜보다가 천천히 돌아서 이장의 집으로 향했다. 돌아서는 순간 얼굴의 미소는 사라졌고 포기한다고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졸업했더라면, 만약 임윤슬의 할아버지가 아팠을 때 병원비를 낼 수 있었더라면 지금의 임윤슬 곁에 있는 사람이 다른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만약'이 존재하지 않았고 임윤슬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였다. 그녀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자신의 행복 따윈 중요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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