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임윤슬은 혼자 차를 타고 본가에 도착했다. 집사는 공대훈이 아직 위층에서 쉬고 있고 김순자가 저녁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알려주자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손을 거들었다.
채소를 다듬는 김순자의 모습을 본 임윤슬을 곧장 다가가 도와주려고 했다.
김순자는 임윤슬이 다가오자 황급히 말했다.
“아이고, 그냥 쉬고 계세요. 매번 오실 때마다 이렇게 도와주시니 제가 다 난감하네요.”
“아니에요, 아주머니. 딱히 할 일도 없고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요.”
임윤슬은 웃으며 대답하며 계속 손을 움직여 도와주었다.
김순자는 오랜 세월 공씨 가문에서 일해왔다. 공지한이 임윤슬과 결혼한 뒤로 쓸쓸하기만 했던 집안에 따뜻한 온기가 불기 시작했다.
공대훈 아들 부부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공대훈과 공지한은 수년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임윤슬이 들어오면서 이 집은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채소 손질을 끝내자 김순자는 기어코 그녀를 내보내 휴식하게 했고 더 이상 손도 못 대게 했다. 고집을 이길 수 없었던 임윤슬은 어쩔 수 없이 주방을 나왔다.
거실에 막 들어서자 집사가 공대훈이 부축하며 내려왔다.
“윤슬이 왔구나. 지한아는 또 바쁜가 보구나.”
공대훈은 집사에게서 임윤슬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내려온 것이었다.
“할아버지, 지한 씨는 오늘 출장 갔어요. 적어도 일주일은 걸린다고 해서 저도 그사이에 고향에 좀 다녀오려고요.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러 왔어요.”
“그래, 알겠다. 네 할아버지 뵈러 가는 거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마음껏 사. 내가 사람 시켜 데려다주라고 할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할아버지. 필요한 건 낮에 이미 사놨고 내일은 지한 씨가 붙여준 기사님이 데려다주기로 한걸요.”
“그래, 그 녀석이 그대로 아내를 챙길 줄 아는 모양이구나.”
공대훈의 말에 임윤슬의 얼굴이 붉어졌다.
“할아버지, 오늘은 저녁 식사만 같이하고 저는 돌아갈게요. 짐은 집에 두어서 내일 아침 기사님이 저를 데리러 올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해. 이따가 밥 먹고는 너무 늦지 않게 가거라. 혼자 이 밤길을 다니면 이 할애비가 걱정된단다.”
“네, 할아버지.”
...
다음 날 아침.
임윤슬은 고향으로 떠났고 운전기사는 평소 공지한을 담당하던 이용철이었다. 전직 군인이라서 그런지 말수가 아주 적었다. 그저 묻는 말에만 대답했고 먼저 말을 걸지 않았지만 대신 모든 일을 묵묵히 잘 처리했다.
가는 길에 이용철은 휴게소에 들르겠냐고 물었지만 임윤슬은 빨리 도착하고 싶어 그냥 가자고 했다.
휴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다.
길이 막히지 않은 덕에 오후쯤에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차는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임윤슬은 차를 어귀에 세우게 하고는 원래 직접 들어가 사람을 부르려 했다.
마침 같은 마을에 살던 친한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지나가다가 이 장면을 보고 기꺼이 이용철과 함께 짐을 공지한의 고급 차 트렁크에서 자신의 트럭으로 옮겨주었다.
임윤슬은 이용철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하고 자신은 트럭에 올라 마을로 들어갔다. 돌아갈 때는 이용철에게 연락하기로 했던지라 이용철은 차를 몰고 떠났다.
이내 고개를 돌려 아저씨에게 짐을 바로 이장 집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하면서 이 선물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달라고 했다.
그녀는 직접 캐리어를 끌며 큰 짐에서 건어물 한 꾸러미와 과일 상자를 챙겨 예전 할아버지와 살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옆집 할머니 댁으로 갔다. 그곳에 사는 할머니인 김옥순은 늘 혼자 있었고 자식들은 모두 큰 도시에 있었다. 임윤슬은 평소 자신과 할아버지가 쓰던 작은 집을 청소해달라고 부탁해왔다.
올 때마다 임윤슬은 수고비라며 소소한 봉투를 건넸는데 처음에는 김옥순이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자 임윤슬은 처음으로 몰래 베개 밑에 봉투를 숨겨두고 갔다.
김옥순은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임윤슬이 다음에 찾아왔을 때 봉투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임윤슬도 이 돈을 받지 않으면 앞으로 자신과 할아버지 집도 봐줄 필요 없다며 고집을 부리고 나서야 김옥순은 봉투를 받았다.
그녀가 들어오자 김옥순은 부리나케 물을 끓여 차를 내며 앉으라고 했다.
“할머니, 전 괜찮아요. 얼른 앉으세요. 제가 할머니가 간단히 드실 수 있는 먹을 것과 과일 좀 가져왔어요. 여기 두고 갈게요. 전 산에 가서 할아버지 좀 뵈려고요.'
“그래, 그래. 어서 다녀오렴. 네 할아버지가 네가 좋은 집안에 시집간 걸 알면 하늘에서도 마음이 놓일 거다. 얼른 다녀오너라. 해지면 산길은 위험하단다.”
“네, 그럼 다녀올게요. 할머니.”
김옥순의 집에서 나온 임윤슬은 캐리어를 집 문 앞에 두고 곧장 산으로 향했다.
약 십여 분쯤 걸어가니 할아버지의 산소 앞에 도착했다. 지난번 추석에 왔을 때보다 벌써 잡초가 무성했던지라 임윤슬은 내일 아침 일찍 올라와 잡초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소 앞에서 임윤슬은 할아버지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이번에는 혼자 왔는데 당분간 여기서 머물 생각이에요. 머무는 동안은 매일 이렇게 와서 예전에 마당에서 얘기를 나눴던 것처럼 할 수 있겠네요.”
“지한 씨는 일이 바빠서 이번에는 못 왔지만 다음에는 꼭 같이 오겠대요. 그리고 할아버지... 저... 아기 가졌어요. 아직 지한 씨한테는 말 안 했고 할아버지께 제일 먼저 알려드리는 거예요.”
“다만 지한 씨가 제 아이를 좋아할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번 출장이 끝나면 꼭 말할 거예요. 지한 씨가 분명 좋은 아빠가 될 거라 믿어요. 할아버지, 아기를 위해서라도 이번엔 꼭 용기를 내보려고 해요. 할아버지도 응원해주실 거죠? 내일 또 올게요.”
해가 이미 저물어 임윤슬은 산에서 내려가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집 앞에 도착하니 놓아둔 캐리어 앞에 채소며 달걀, 고기 한 덩이까지 놓여 있었다.
임윤슬은 이장이 자신이 사 온 선물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마을 사람들이 자신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 거라는 걸 바로 알았다.
짐과 마을 사람들이 준 먹거리를 들고 집으로 들어온 임윤슬은 먼저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 간단히 나물 반찬과 달걀국을 끓여 저녁을 해결했다.
채소는 전부 마을 사람들이 농약을 치지 않고 재배한 것이라 채소 본래의 단맛이 났고 달걀은 직접 키운 토종닭이 낳은 것이었다.
임윤슬은 이 달걀이 마을 사람들이 평소에 아껴먹던 달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 아이들이나 임산부를 위해 남겨두었으니까.
저녁을 먹은 뒤 임윤슬은 의자를 가져와 문 앞에 앉았다. 가을의 저녁 공기는 제법 선선했고 하늘은 어두웠지만 달빛이 마당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일찍 잠자리에 드는 터라 사방은 고요했고 가끔 개 짖는 소리만 들려왔다.
임윤슬은 담요를 하나 가져와 두르고 시골의 맑은 공기 속에서 앉아 있자니 자연스럽게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릴 적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곁에는 늘 할아버지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할아버지가 데려온 아이라고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녀를 아껴주었다. 본인은 먹고 입는 것조차 아끼면서 늘 그녀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했으니까.
임윤슬에게 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 그 자체였고 세상에서 유일한 가족이었다.
물론 지금은 또 한 분의 할아버지가 생겼고 곁에는 공지한과 곧 태어날 아이도 있다.
임윤슬은 자신이 참으로 운 좋은 사람이라며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공지한이 그리워져 핸드폰을 꺼내 보았지만 아무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괜히 방해될까 싶어 문자를 보내지도 못했다.
낮에 이용철에게 출장지를 물으니 페이라라고 했다. 처음 들어본 곳이었고 그곳이 혼란스럽다는 얘기만 들은 적이 있었던지라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문 앞에 앉아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으니 이내 졸음이 밀려왔다. 임신한 뒤로는 유난히 잠이 많아졌다.
임윤슬은 일어나 의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간 뒤 씻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산소로 가서 잡초를 정리해야 했기에 일찍 쉬는 편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