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유재윤과 강은성이 떠나니 집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유재윤은 그들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걱정이 없는 캐릭터였다. 어쩌면 막내라 늘 형들이 챙겨주니 근심거리가 적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임윤슬과도 가장 가깝게 지냈다. 틈만 나면 밥을 얻어먹으러 집에 들렀으니까.
강은성은 늘 연예계 스캔들로 시끄러웠지만 여자친구를 가족에게 소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겉으로는 언제나 젠틀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 오지 않은 우현은 그들 중 가장 점잖고 침착한 사람이었지만 주로 해외에 있어 만날 기회가 적었다. 그래도 마주할 때마다 늘 예의 바라고 매너 있는 모습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했다.
지세원은 말수가 적어 그저 만날 때마다 인사만 건넸다. 하지만 유재윤의 말로는 겉보기엔 얌전해도 실제로는 잔혹할 만큼 냉정하다고 했다.
그래서 유재윤은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지세원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고 늘 강은성만 따라다녔다.
임윤슬은 유재윤에게 공지한에 관해 물은 적도 있었다.
“그럼 지한 씨는요?”
그때의 유재윤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한이 형은 당연히 현이 형이랑 세원이 형보다 훨씬 더 대단하죠. 지한이 형이 결정만 내리면 저희는 감히 어길 엄두가 나지 않는걸요.”
임윤슬은 궁금했다. 그들이 왜 이토록 공지한을 두려워하는지 말이다.
여하간에 3년 동안 지내며 느끼기엔 차갑기는 해도 다른 면에서는 크게 문제없어 보였으니까.
그러자 유재윤은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그들을 이끌던 사람은 늘 공지한이었고 목숨까지 맡길 만큼의 신뢰가 쌓였다고 말이다.
임윤슬은 공지한의 회사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함께 세운 회사이고 여러 분야를 다루며 늘 바쁘고 출장이 잦다는 정도만 알 뿐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죽여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라는 유재윤의 표현은 그저 과장된 비유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들 형제의 우애만 큼은 피보다 진했다.
밤이 되어 잠들기 전 공지한은 지세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페이라 쪽에 문제가 생겨 공지한이 직접 가야 한다는 소식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임윤슬과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공지한은 임윤슬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내일 출장 가야 해.”
“얼마나 오래 걸려요?”
“빨리 다녀오면 일주일, 길면 보름쯤 될 거야.”
“큰일이에요?”
임윤슬은 저도 모르게 그를 걱정했다.
“아니. 세원이가 이미 처리하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공지한은 임윤슬이 너무 많은 걸 알지 않길 바랐다.
“그동안 본가에서 지내는 게 어때. 할아버지도 뵐 겸.”
“전 고향에 다녀오고 싶어요. 우리 할아버지 뵈러요.”
임윤슬은 꽤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갔던 것도 추석에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뵈었을 때였다. 강진과 그녀의 고향은 거리가 멀어 이번 기회에 조금 오래 머물 생각이었다.
임윤슬이 말한 ‘할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의 할아버지임을 알아챈 공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운전기사를 보내줄게. 나중에 내가 돌아오면 같이 가서 인사드리자.”
공지한은 임윤슬이 고향에 갈 때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을 챙겨 가는 걸 알았고 행여나 짐이 많이 불편할까 봐 운전기사를 붙여주겠다고 했다.
“네.”
임윤슬은 거절하지 않았다. 확실히 챙겨 갈 것도 있고 무엇보다 임신 중이라 버스를 타고 가는 건 위험하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의사도 첫 석 달은 조심하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계약을 제쳐두고 보면 공지한은 남편으로서 할 일을 거의 다 하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고.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다는 걸. 사랑하지 않는 건 그저 사랑하지 않는 것일 뿐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혹시 공지한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건 그동안 잠자리를 가졌기 때문에 책임감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지난번 윤하영이 찾아왔을 때 임윤슬은 억지로 핑계를 대고 쫓아냈다. 남편의 첫사랑과 도저히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언젠가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걸 알았고 자신이 남의 행복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 큼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자신을 계산적이라고 욕해도, 탐욕스럽다고 손가락질해도 공지한이 먼저 떠나기 전까지 절대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 출장에서 그가 돌아오면 임신 사실을 알리고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용기 내어 그를 붙잡아 보려고 했다.
공지한은 임윤슬을 안은 채 천천히 그녀의 등에 입을 맞추며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몸을 돌렸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치고 혀끝이 파고들어 그녀의 숨결을 탐하고 있었다.
임윤슬은 배 속의 아이가 걱정되었지만 거절할 줄을 몰라 작게 말했다.
“음... 살살해줘요.”
그 소리는 무의식적으로 난 신음이었지만 마치 애교처럼 들렸다.
“알았어.”
공지한의 잠긴 목소리에는 억누른 듯한 욕망이 묻어 있었다.
그는 절대 이 일에 중독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성격이 차갑게 변해버렸으니까.
심지어 과거에 윤하영과 사귀었을 때도 이런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결혼하고 나서야 관계를 가지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윤슬과 결혼한 후에도 처음에는 이런 잠자리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기에 임윤슬 말고는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임윤슬과 한 번 잠자리를 가진 뒤로는 마치 풋내기 소년처럼 점점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계약 결혼이었으니 이렇게 하는 게 임윤슬에게 불공평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었고 그저 이 결혼이 이어지는 동안 남편으로서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려 했다.
이날 밤, 공지한은 그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부드러움으로 임윤슬을 달랬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듯한 착각에 빠졌고 결국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모든 게 끝난 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늦게 일어난 임윤슬의 곁에는 이미 공지한이 없었다. 다만 구겨진 시트만이 지난밤의 흔적을 말해줄 뿐이었다.
임윤슬은 간단히 배를 채운 뒤 고향에 가져갈 물건을 사러 나갈 준비를 했다.
예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시골에 살 때 이웃들은 늘 따뜻하게 그녀를 챙겨주곤 했다. 오늘은 이 집에서 채소를, 내일은 저 집에서 달걀을 건네주는 그런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정이었다.
임윤슬은 그 은혜를 잊지 못해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작은 선물을 챙겨 가곤 했다.
물론 값비싼 건 아니었다. 여하간에 자신이 돈을 버는 게 아니었고 늘 공지한이 준 카드를 쓰고 있었으니까.
예전에는 생활비 외의 물건을 사려면 항상 공지한에게 미리 알려야 했다.
나중에 공지한은 귀찮았는지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자신에게 일일이 말하지 말고 그냥 사라고 했다.
여하간에 임윤슬이 쓰는 돈은 공지한이 하룻밤에 쓰는 비용에도 못 미쳤으니까. 그의 눈에는 그저 용돈 수준도 안 되는 셈이었다.
처음에는 공지한의 비서가 매달 명품 옷과 가방을 챙겨 보내주었지만 임윤슬은 평소에 입지 않으니 더는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 대신 인터넷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브랜드의 옷을 사 입고 가끔은 직접 리폼해서 입었다. 그 옷들은 비싸지 않으면서도 편하고 멋스럽기도 했다.
사실 그녀에게는 오래전부터 꿈이 있었다. 바로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
시골에서 살던 시절에도 시간이 나면 늘 초안을 그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윤슬이는 분명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 거야.”
하지만 할아버지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임윤슬은 할아버지를 데리고 온갖 병원을 가보며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렸고 끝내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친구인 공대훈과 그의 손자 공지한을 만나 또 다른 거처가 생겼고 3년 동안 그녀는 늘 고마움을 품고 살았다.
임윤슬은 쇼핑몰에 들러 시골에 남아 있는 아이들을 위해 겨울용 패딩과 학용품을 샀다. 그러고 난 후 슈퍼에 가서 건조식품과 과일도 챙겼다.
시골에는 어르신과 아이들만 남아 있었고 젊은이들은 모두 돈을 벌러 도시로 나가 있었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건조식품을 산 것도 그녀의 세심한 배려였다.
물건은 어느새 큰 상자 두 개를 가득 채웠다. 임윤슬은 운전기사에게 먼저 물건을 저택으로 가져다 놓고 내일 아침에 자신을 태우러 오라고 말했다.
오늘은 늦었던지라 밤에 운전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해 그녀는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도 했다.
대신 오늘 밤에는 공대훈을 뵈러 가 인사드리기로 했다. 공지한은 출장을 가고 자신은 고향으로 내려가면 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