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임윤슬이 본가에 도착하자 집사가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오셨군요. 어르신께서는 정원에 계십니다.”
“네, 고마워요. 저 혼자 가면 돼요.”
임윤슬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공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소박하고 온화한 임윤슬을 모두 좋아했다.
정원으로 간 임윤슬은 의자에 앉아 옆에 찻잔을 내려두는 공대훈을 보았다. 임윤슬이 다가가자 공대훈의 안색이 환해졌다.
“윤슬이 왔구나. 어서 오렴. 지한이는 같이 안 왔니?”
“네, 할아버지. 지한 씨는 회사에 일이 많아서 혼자 왔어요.”
“그놈 참, 맨날 일만 한다니까.”
“회사가 워낙 바쁘잖아요. 거기에다 사장이니까 다른 사람보다 바쁜 건 당연해요.”
“넌 참, 늘 그놈 편만 드는구나. 오늘은 여기서 같이 저녁 먹자꾸나.”
“네, 할아버지.”
임윤슬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와 저녁을 막 마친 뒤 임윤슬은 공지한의 친구인 유재윤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형수님, 저희 지금 블루나잇에 있는데 지한이 형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요. 와서 좀 데려가 주시겠어요?”
“네, 지금 갈게요.”
임윤슬은 공대훈에게 인사를 하곤 서둘러 집을 나섰다.
...
호화로운 블루나잇 VIP 룸에 잘생긴 남자가 다섯이 앉아 있었고 그중 가운데 반쯤 누워 있는 남자가 단연 돋보였다.
그들은 모두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고 나이순으로 공지한, 우현, 지세원, 강은성, 그리고 막내가 유재윤이었다.
오늘따라 공지한은 술을 과하게 마셔 불편했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소파에 기댔다.
“형,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마셨어?”
유재윤은 여전히 눈치 없이 물었다.
“윤하영이 내일 돌아온대.”
이때 여자도 부러워할 만큼 고운 얼굴을 한 남자가 말했다.
“뭐? 씨, 그게 정말이야? 걔가 왜 또 오는데?”
유재윤은 욕설을 내뱉었다.
“누가 알겠냐.”
“현이 형은 그거 어떻게 알아?”
“지한이가 말했지.”
“흥, 지한이 형은 뭐든 현이 형한테만 얘기한다니까. 치, 난 이제 더는 지한이 형의 귀염둥이 막내가 아닌가 보네.”
“넌 처음부터 귀염둥이 막내가 아니었거든.”
검은 셔츠 차림의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 세원이 형!”
그러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지한이 형이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건 아니겠지? 혹시 두 사람이 다시 잘 되기라도 하면 형수님은 어떡해?”
“우린 괜한 참견하지 말자. 지한 형이 알아서 하겠지. 난 이만 가야겠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강은성이었다. 내일 아침 출장을 가야 했던지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가자. 재연아, 지한 형은 네가 책임지고 집에 데려다줘.”
우현과 지세원도 함께 일어나며 말했고 셋은 그대로 떠나버렸다.
“형들, 뭐야! 이렇게 지한이 형을 두고 간다고?”
“우리 중에 네가 제일 한가하잖아. 당연히 네가 데려다줘야지.”
세 사람은 유재윤의 체면 따위는 없다는 듯 봐주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유재윤은 소파에 축 늘어진 공지한을 보며 상냥하던 형수를 떠올렸고 바로 핸드폰을 꺼내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윤슬이 바에 도착했을 때 유재윤이 혼자 공지한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좀 늦었죠? 혼자예요?”
“형수님, 오셨네요. 전혀 안 늦었어요. 형들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갔고 저는 이따가 게임 약속이 있어서 형수님을 불렀죠.”
유재윤은 조금 전까지 게임을 하던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바에서 잘생긴 남자가 게임을 하며 더 잘생긴 술 취한 남자를 지키는 모습은 꽤 특이한 광경이었지만 어차피 바 주인이 지세원이라 유재윤은 거리낄 게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많이 마신 거예요? 이틀 전만 해도 위장병이 도져서 겨우 좀 나아졌는데.”
“음... 그게... 아마 우리랑 같이 있으니까 기분이 좋아서 더 마신 것 같아요. 다음에는 꼭 제가 적당히 마시라고 해둘게요.”
유재윤은 대충 둘러댔다.
임윤슬은 공지한의 친구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현재 그룹을 세워 급속히 성장시켰고 강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넓혔으며 해외 시장까지 진출했다. 가끔은 집에 놀러 오거나 본가에서 함께 마주치기도 했다.
“형수님, 차 안 가지고 오셨죠? 이건 지한이 형 차 키예요. 얼른 데리고 가세요.”
유재윤은 차 키를 건넸다.
“네. 택시 타고 왔으니까 제가 운전해서 갈게요.”
“넵, 그럼 제가 형을 차에 태울게요.”
“네.”
유재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임윤슬은 혼자서 공지한을 차에 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둘은 힘을 합쳐 공지한은 뒷좌석에 눕혔고 임윤슬은 운전석에 앉았다.
“형수님, 운전 괜찮으시죠? 아니면 대리 불러드릴까요?”
유재윤은 공지한의 차가 크다 보니 임윤슬이 불편해할까 봐 걱정됐다.
“괜찮아요. 천천히 가면 돼요.”
좋아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봬요!”
“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차는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로 나왔다.
임윤슬은 잔뜩 긴장해서 앞만 똑바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속도가 너무 느려 뒤차들이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뒷좌석에 깊이 잠든 줄 알았던 남자가 눈을 뜬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 공지한은 임윤슬이 바에서 유재윤과 대화할 때부터 이미 정신이 들었지만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은 운전석에 앉아 작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핸들을 꼭 쥐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오늘 밤 윤하영에게서 갑작스럽게 전화가 왔다. 그녀가 돌아왔다며 자신에게 마중 나오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지한아, 나 돌아왔어. 내일 공항에 마중 나와 줄래?”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군. 난 이미 결혼했으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사무실 서랍 속에서 반지를 꺼냈다가 다시 던져 넣었다.
예상치 못한 전화에 마음이 뒤숭숭해진 그는 유재윤과 친구들을 불러 지세원의 바에서 술을 과하게 마셨던 것이다.
3년 전 그는 아주 성대한 프러포즈를 준비했으나 주인공인 윤하영은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파뤠로 떠나 발레의 꿈을 좇겠다고 말했다. 혼자 꽃밭에 서서 반지를 들고 기다리던 공지한은 그렇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반 시간 거리였지만 임윤슬은 거의 한 시간을 걸려서야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차에서 내릴 즈음엔 공지한이 제법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일어났어요? 걸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공지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임윤슬은 몸을 숙여 그를 부축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두 사람은 함께 거실로 들어왔고 임윤슬은 그를 소파에 눕힌 뒤 주방으로 가 꿀물을 타왔다.
그 사이 공지한은 거의 정신을 차려 스스로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꿀물을 들고나온 임윤슬은 그가 소파에 앉아 찌푸린 얼굴로 허공을 멍하니 보며 앉아 있는 걸 보았다.
“깼네요. 이거 먼저 마셔요.”
“응. 두고 가. 늦었는데 먼저 자. 난 이따가 씻고 잘게.”
임윤슬은 잠시 거실에 서 있었다.
“왜? 할 말 있어?”
공지한은 들어가지 않고 우뚝 서 있는 임윤슬을 보며 물었다.
“아, 아이네요. 오늘 할아버지 뵈러 갔는데 시간 되면 같이 식사하러 오라고 하셨어요. 너무 일만 하지 말라고도 하셨고요.”
“알았어. 내일 같이 가자.”
“네.”
임윤슬은 끝내 임신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제 석 달 뒤면 두 사람의 3년 계약이 끝이 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