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배성빈은 집 안이 난장판이 된 광경을 보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바닥에는 깨진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고 익숙하던 물건들은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한가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배성빈은 바닥에 널린 조각들을 가리켰다.
“이런 것들... 우리 평생 간직하기로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네 마음대로 다 망가뜨린 거야?”
한가을은 잠시 시선을 피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은 이미 변질됐는데... 이런 걸 붙잡고 있어 봤자 슬프기만 하잖아. 차라리 없애는 게 나아. 그러니까 우리 이혼하자.”
그 한마디에 배성빈의 인내심은 완전히 끊어졌다.
“한가을, 이틀 동안 네가 이혼 얘기를 몇 번이나 꺼낸 줄 알아? 난 네 문자 하나 보고 급하게 돌아왔어. 그리고 김은주는 잠깐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그런데 넌 왜 이렇게 쪼잔하게 구는 거야?”
한가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라... 그 애가 날 못 받아들이는 거야.”
그 순간 배성빈은 한가을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바닥에서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한가을, 넌 가족도 없잖아. 그런 네가 나 없이 뭘 할 수 있는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날 선 칼날이 되어 한가을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베어냈다.
부모님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모든 친척은 하루아침에 이리떼로 변했다.
그때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사람은 배성빈뿐이었다.
그 이후로 한가을에게 그는 유일한 가족이었고 망망대해에서 붙잡은 단 하나의 부표였다.
한가을은 이미 죽은 몸이었기에 이런 협박 따위 아무 의미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미 아물었다고 믿었던 마음속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피를 흘렸다.
“왜...”
한가을은 끝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그제야 배성빈은 자신이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 그녀를 급히 끌어안아 달래기 시작했다.
“가을아, 미안해. 방금 내가 한 말은 진심이 아니야.”
그러나 슬픔이 한계에 다다른 그녀는 배성빈의 품을 확 밀어냈다.
“왜... 너는 갑자기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
그는 다시 한가을을 끌어안은 채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에 하나하나 입 맞추며 속삭였다.
“무슨 소리야. 난 아직도 널 사랑해.”
“그럼... 우리 이혼하자.”
그 한마디에 배성빈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는 한가을을 벽으로 밀어붙이며 분노를 터뜨렸다.
“한가을! 넌 왜 그렇게 이혼에 집착하는 거야!”
“난 죽었으니까.”
한가을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내 마지막 소원이 너와 이혼하는 거야. 더는 아무 관계도 남기고 싶지 않아.”
그녀는 그날 밤의 일을 말했다. 차에서 내린 뒤 골목으로 끌려가던 순간을...
그러나 ‘7일간의 의 환혼’ 이야기에 이르자 배성빈은 다시 언성을 높였다.
“한가을, 너 스물일곱이야! 애도 아니고, 나도 바보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 좀 그만해! 은주를 정말 못 견디겠으면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어.”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지금 은주랑 못 끊겠으니까 나를 해외로 보내겠다는 거야?”
배성빈은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질리면 알아서 가정으로 돌아올 거야.”
한가을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날을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그날 이후, 한가을과 배성빈 사이에는 냉전이 시작됐다.
남은 시간은 고작 닷새뿐이었다.
그래서 한가을은 자꾸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늘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요 며칠은 집에 안 들어갈 거야. 넌 지금 너무 감정적이야.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한가을은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배성 그룹으로 향했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새로 배치된 프런트 직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성빈이를 만나야 해요.”
직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응대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대표님께서 외부인을 만나기 어려우십니다. 예약이 있으시면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성빈이 아내예요.”
직원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은주 씨께서 미리 전달해 주셨어요. 대표님과 함께 계실 때는 누구든 방해하면 안 된다고요. 아내분이라도 예외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가을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회사에 발을 들였을 뿐인데 이미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때 밝은 목소리와 함께 김은주가 다가왔다.
“가을 언니!”
그녀는 핑크 컬러의 원피스에 최신형 명품 가방을 들고 있었다.
젊고 화사한 모습은 마치 이곳의 주인인 양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