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그때의 약속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지만 사랑을 담아 건넸던 그 반지는 지금 김은주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다.
한가을은 한동안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녀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아까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두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휴지를 내밀었다.
그러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어... 저기, 혹시... 배성 그룹 사모님 아니에요?”
한가을은 잠시 멈칫하다가 휴지를 받아 들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이제 배성 그룹 사모님이 아니에요. 앞으로도 아닐 거고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덧붙였다.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는 것 같아요. 과정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과는 결국 다 비슷하니까요.”
한가을은 그 말을 끝으로 비틀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두 여자는 그녀의 쓸쓸한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집에 돌아온 뒤, 한가을은 결국 고열에 시달렸다.
기운이 빠진 채 소파에 몸을 던진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열여덟 살의 가을로 돌아가 있었다.
기억은 자연스레 태어나 처음 지각했던 그날로 이어졌다.
...
교문 앞에서 근무 중이던 배성빈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열여덟의 소년은 깔끔하고 마른 체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가을이 출석부에 이름을 적는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한가을. 이름 예쁘다.”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으으윽...”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열은 더욱 심해졌다.
몽롱한 의식 너머로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것 같았다.
이어서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이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배성빈...?”
한가을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나 여기 있어.”
대답한 건 풋풋한 열여덟 살의 배성빈 목소리였다.
그 순간 한가을을 눈을 번쩍 떴다.
거실은 어둡고 고요했고 그곳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따뜻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려 쿠션을 천천히 적셔갔다.
그 뒤로 사흘 동안 한가을은 배성빈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마음을 닫은 사람처럼 메시지도 읽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한가을의 카드까지 모두 정지시켰다.
그녀는 남은 시간이 이틀뿐이라는 사실에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배성빈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온 목소리는 차갑고 성급했다.
“대표님을 찾으시려면 김은주 씨에게 연락하세요. 요 며칠, 대표님은 계속 그분과 함께 계십니다.”
비서는 말을 끝내자마자 통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한가을은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치욕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비서의 태도는 곧 배성빈의 태도이기도 했다.
그때 김은주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비서님이 저한테 말해 줬어요. 언니, 진짜 불쌍하네요. 성빈 오빠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다면서요?]
이어 여러 장의 사진이 연달아 전송됐다.
모두 배성빈과 다정하게 밀착해 찍은 사진들이었다.
사진 속 배경이 된 방은 한가을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솔직히 말해 줄게요. 오빠랑 나, 지금 미국이에요.]
[내일, 약속대로 오빠가 저한테 프러포즈할 거예요.]
[보러 올래요? 아, 맞다. 언니 지금 돈도 없죠? 예전에 제가 대학 다닐 때 언니가 도와줬던 거 생각해서 비행기 값 보내 줄게요. 꼭 와야 해요!]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계좌로 200만 원이 입금됐다.
한때는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던 아이가 이제는 배성빈의 돈으로 그녀를 모욕하고 있다.
한가을은 웃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
여정은 길었다.
하루가 넘는 이동 끝에 한가을이 에테르나 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지막 날 오후였다.
남은 시간은 고작 몇 시간뿐이다.
조금만 더 늦어도 그녀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