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정서연이 경찰서에서 나왔을 때는 밤 아홉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휴대폰을 켜니 안부 메시지가 빼곡했다. 모두 동료와 친구들이 보낸 것이었고, 남편인 최재현에게서 온 것은 한 통도 없었다.
피로가 어려 있는 얼굴에는 한층 더 쓸쓸함이 내려앉았다.
집 문을 밀고 들어서자 도우미가 놀라며 멈춰 섰다.
“사, 사모님, 어떻게... 아니, 괜찮아요?”
정서연은 도우미의 불안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딸의 방문을 여는 순간 들뜬 통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모가 말한 대로 했어요. 엄마 진짜로 경찰 아저씨한테 잡혀가요?”
손발을 휘두르며 신나게 말하는 최예진은 문간의 정서연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알고 보니 최예진은 자신이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걸 알고 일부러 점심밥에 땅콩 가루를 넣었다. 그리고 경찰에 엄마가 넣었다고 거짓 신고해 집혀가게 되는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다.
그녀가 갇혀 있어야 아빠와 이모, 그리고 자신이 함께 나가 생일을 즐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최예진이 재잘재잘 정수아와 통화를 마치고 돌아보자마자 그녀를 발견했고, 어린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두 눈에는 놀람과 불만이 선명했다.
“경찰 아저씨가 왜 엄마를 안 잡아갔어?”
목이 콱 막혔지만 정서연은 애써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엄마가 잡혀가는 걸 그렇게 바라니?”
정성을 다해 5년을 키운 딸이 자신을 이토록 싫어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엄마가 이모랑 같이 생일 보내는 거 막지 않으면 경찰 아저씨한테 안 잡혀가게 해 줄게.”
최예진은 조그만 얼굴에 대단히 관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 나는 이해가 안 돼. 엄마랑 이모는 둘 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딸인데 왜 엄마는 일하고 밥하기만 하고 전혀 멋있지 않는 거야? 이모는 달라. 이모랑 나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알아? 이모는 예쁘고 옷도 잘 입고 성격도 좋아. 아빠도 이모가 엄마보다 낫대.”
“...”
“그러니까, 엄마. 내 생일 파티에 오지 말고 일하러 가면 안 돼?”
한참 정수아를 칭찬하던 최예진은 마침내 본심을 꺼냈다.
가슴이 죄어 오르자 정서연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엄마는 억울하게 경찰한테 잡혀가도 상관없다는 거니?”
“잠깐이면 되잖아.”
최예진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또 이 일로 잔소리하는 거야? 이모는 절대 안 그래. 내가 잘못해도 이모는 한마디도 안 해. 엄마는 진짜 짜증 나.”
정서연은 더 말하지 않았다.
딸을 오래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섰다.
등 뒤로 최예진의 거친 외침이 따라왔다.
“내일 또 이모랑 같이 생일 보내지 말라고 난리 치지 마! 방해하면 엄마랑 완전히 끝이야! 또 경찰 불러서 잡아가게 거야!”
목소리가 워낙 커서 도우미도 다 들었다. 도우미는 난처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사모님, 아가씨가 아직 어려서 잘 몰라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정서연은 짧게 대답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최재현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통화 연결음이 한참 울린 뒤에야 최재현이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무심했다.
“지금 중요한 일 있어서...”
“오빠, 준비 다 됐어?”
뒤에서 정수아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정서연은 휴대폰을 꼭 움켜쥐었다.
“일 봐.”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결혼한 지 6년, 부부가 실제로 함께 보낸 시간은 많지 않았다.
최재현은 늘 바쁘다며 국내외를 오갔고, 그녀는 의사라 근무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쉬는 날마다 그녀는 최재현과 최예진의 일정에 맞춰야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배려가 그들에게는 짐이 되었고, 남편과 딸은 그녀가 휴가를 내지 않기를 바라게 됐다.
사실 그녀는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예전 같았으면 왜 이렇게 늦게까지 정수아와 함께 있는지 집요하게 물었을 것이다. 또 최예진이 일부러 땅콩을 먹은 걸 그가 묵인했는지 끝까지 확인하는 것이 그녀의 성향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지쳤다. 어떤 의욕도 솟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휴가를 철회하고 출근 준비를 마쳤다.
동료들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닥, 오늘 딸 생일 아니었어요? 휴가까지 내고 왜 출근했어요?”
“그러니까요, 어제 일 때문에 화나서 생일도 안 챙기려는 건 아니죠?”
“애들은 원래 장난이 심하잖아요!”
한 동료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제 아들이 숙제 때문에 화나게 해서 한 대 때렸거든요? 그런데 얘가 경찰에 신고하더라니까요! 결국 집에 돌아와서 다시 혼냈어요.”
주변 동료와 환자가 웃음을 터뜨렸고, 정서연도 따라 웃었다.
최예진도 잠깐 욱한 것뿐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점심 무렵, 동료가 점심을 사다 줄까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최예진은 어려서 잊더라도, 최재현은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라는 걸 기억할 거라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깜짝 파티를 준비했을지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오후 근무가 끝날 때까지 최재현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희망은 정수아의 SNS를 본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생일 초가 최예진의 앳된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었다. 아이는 두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앞으로 매년 생일에 엄마가 나타나지 않기를...”
“이모가 언제나 예진이 곁에 있어 주고, 아빠랑 이모가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영상 속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정서연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딸은 그녀가 직접 키워 왔다. 그런데 올해 하반기 들어 늘 바쁘던 최재현이 딸을 자주 데리고 나가더니 반년도 안 돼 딸의 마음은 완전히 아빠에게 기울어 버렸다.
질투가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녀는 부녀간 화목을 더 바랐다.
그 역시 양심이 돌아와 부녀 사이를 돈독히 하려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반년 전 귀국한 정수아를 만나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었다.
여러 번 항의했지만 최재현은 그녀가 더러운 생각만 한다고 몰아세웠다.
정말 더러운 쪽이 누구일까?
딸이 상처받을까 봐, 그들의 애매한 관계를 알면서도 이혼은 생각하지 않았다. 딸만 행복하다면 뭐든 견딜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보니, 오히려 자신이 딸을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정닥, 원장님이 찾으세요.”
멍하니 서 있던 정서연에게 동료가 말했다. 그녀는 급히 눈물을 훔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서연아, 생각 끝났어? 이번 연수 기회 정말 포기할 거야? 다음에는 기회 잡기 이렇게 쉽지 않아.”
원장은 한숨을 쉬었다.
“이사진도 너를 계속 주목하고 있어.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승진도 힘들어.”
원장은 대학 시절의 은사였다.
그는 연수 소식이 내려오자마자 그녀를 불러서 설득했지만, 그녀는 최재현과 최예진 때문에 단호히 포기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장님, 저 갈게요.”
“아무리 가정이 중요해도 그렇지, 직장... 잠깐, 너 뭐라고?”
“한 달 뒤, 정시에 출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