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원장은 기분이 좋아져서 오후에는 무조건 쉬라며 생일을 잘 보내라고 했다.
병원을 나선 정서연은 마음이 텅 빈 채 거리만 헤맸다.
휴대폰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지만, 최재현이나 최예진 중 누구도 축하의 말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목적지 없이 거리를 떠돌아다녔다.
띠링.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확인했다. 쇼핑 앱 쿠폰 알림인 것을 보고는 금세 눈가가 붉어졌다.
늘 감정을 드러내기를 꺼리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빠, 저녁에 같이 밥 먹을래요? 제가 호텔 잡을게요.”
긴 침묵 끝에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서연아, 오늘 수아랑 재현이가 예진이 생일 챙겨 줘서 그러니? 네 마음 상한 건 알지만 굳이 수아를 곤란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어? 생각해 봐라, 네가 그때 혼전임신만 안 했어도 지금 재현이랑 결혼한 사람은 수아였을 거야. 재현이도 네가 아닌 수아를 사랑해... 서연아, 엄마가 부탁할게. 두 사람 좀 도와줘.”
그녀의 부모가 보는 그녀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저 밥 한 끼 먹고 싶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기대가 잿더미로 변하며 속에서 무엇인가 와장창 부서졌다. 그녀는 부모의 터무니 없는 말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억울한가? 아니, 언젠가부터 익숙해졌다.
부모는 어려서부터 정수아를 편애했다. 그녀가 두 살 많은 언니라는 이유로 늘 양보를 요구했고, 정수아가 불만이면 언제나 그녀의 책임이었다.
정수아의 기분만 풀린다면 그녀가 뺨을 맞아도 부모는 정수아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그녀를 붙잡고 정수아가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게 했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감정을 헤아려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의 남편과 딸도 다르지 않았다.
실망스러운가? 예전에는 그랬겠지만 이제는 무감각했다.
허기진 배를 달래러 들어간 작은 식당은 대학 때 최재현과 자주 찾던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문을 열자 주인 부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고기가 잔뜩 올라간 우육면을 내오며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가씨, 오랜만이네요. 이 맛이 그리웠을 거예요. 근데 그 잘생긴 남자랑은 어떻게 됐어요? 지금도 만나고 있나?”
몇 년이 흘렀는데도 아주머니는 최재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서연은 젓가락을 들다가 손을 멈췄다.
“아니요.”
“아니면 다행이네요. 제가 그 남자 믿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참았거든요. 얼굴은 반반해도 인성이 별로였어요. 그 사람, 아가씨 동생 꼬시려고 아가씨랑 만난 거예요. 그때도 알려 주고 싶었는데 괜히 참견한다고 싫어할까 봐 입 다물었죠.”
아주머니는 옛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정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부모도 친구도 주변 사람도 다 눈치채고 있었다. 오직 그녀만 안개 속에 서서, 자신이 너무 바빠서 최재현이 다른 마음을 품은 거라 착각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연히 최재현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조수석에는 정수아가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막 사랑에 빠진 연인 같았다.
뒷좌석에는 최예진이 배를 내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정서연은 무심결에 휴대폰을 꺼냈다가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끊었다.
‘내가 괜히 나설 일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자 그녀는 곧장 별장으로 달려가 이혼협의서를 작성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술 취한 그날 밤 최재현과 잠자리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신도, 지난 6년의 허무한 세월도 없었을 테니까.
밤 10시, 최재현이 비몽사몽인 최예진을 안고 집에 들어왔다. 최예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빠, 왜 꼭 집에 와서 자야 해요? 저는 이모랑 같이 자고 싶은데.”
집에 엄마만 없으면 이모와 떨어질 필요 없다는 투정이었다.
최재현은 그 말을 굳이 고치지 않았다.
“서연아.”
아래층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예진을 씻겨 달라는 부탁 같았지만, 정서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곧 도우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모님 주무시는 것 같아요. 제가 예진이 씻길게요.”
최예진을 넘겨받은 도우미는 몇 번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사모님 생일인데 같이 안 보내셨어요?”
최재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무심히 말했다.
“나이가 곧 서른인데 생일은 무슨. 서연이는 병원 일로 바빠서 생일 챙길 틈 없었을 거예요.”
도우미는 한숨만 내쉬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정서연은 그 무심한 한마디에 쓴웃음을 지었다.
불과 몇 달 전, 그는 정수아에게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어 주며 어떻게 말했던가?
여자의 생일은 하나하나 다 소중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했다. 사랑과 무관심은 이토록 명확했다.
최예진이 목욕을 마치고 나와 물었다.
“아빠, 엄마 생일 안 챙겨 줘서 엄마가 화내지 않을까요?”
‘화?’
최재현의 기억 속에서 정서연은 별로 화낸 적 없었다. 유일하게 화낸 두 번은 다 정수아 때문이었다. 그 일도 그가 한번 혼낸 다음에는 다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이런 정서연이 꽤 만족스러웠다. 말 잘 듣는 여자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최재현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혹시 화나도 금방 괜찮아질 거야.”
“맞아요! 엄마는 뭐든 퍼주는 걸 제일 좋아하잖아요.”
최예진은 해맑게 웃었다.
‘퍼주는 걸 좋아해?’
정서연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날 밤 최재현은 안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이혼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최예진을 학교에 데려다주러 나갔다.
‘됐어.’
그녀는 병원에 직원 숙소를 신청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6년의 결혼 생활 중 생긴 그녀의 물건은 생각보다 많았다.
두 시간 가까이 정리하고 보니 남은 건 죄다 추억뿐이었다.
입안이 쓰게 말라붙었다. 결국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전공 서적만 챙겨 나섰다.
이혼협의서는 봉투에 넣어 화장대 위에 두었는데, 문을 닫는 순간 불어온 바람에 봉투가 화장대 뒤 틈으로 떨어졌다.
직원 숙소로 옮긴 첫날, 낯선 환경에 잠을 설칠 줄 알았지만 6년 만에 처음으로 푹 잤다.
잠시 머무를 곳이라 과하게 꾸미지도, 불필요한 물건을 들이지도 않았다.
생활은 다시 학생 시절처럼 병원과 숙소를 오가는 단순한 두 지점으로 수렴했다.
그러던 어느 날 휴대폰에서 급한 벨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