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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제는 다 중요하지 않았다. 정서연은 자신을 비웃는 듯 웃음을 흘리며 기계적으로 땅콩을 입에 집어넣었다. 고소한 땅콩 향에 살짝 짭짤한 눈물이 섞여 입안 가득 퍼졌다. 그 씁쓸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최재현과 최예준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여전히 캄캄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정서연이 거실 조명을 켜 두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최재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불을 켜고 2층을 힐끗 바라보았다. 도우미가 허둥지둥 내려와 거의 잠든 최예준을 안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던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아직 안 오셨어요. 전화 한번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서연이가 집에 없어요?” 최재현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네, 어젯밤부터요. 사모님이 원래는 절대 그러시지 않았는데...” 도우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서연의 서러움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몽롱하게 이야기를 들은 최예준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빠, 엄마 안 와요? 그럼 잘됐어요! 우리 내일 이모 데려오면 안 돼요?” “예준이 데리고 올라가서 재워요.” 최재현이 낮게 말하고는 곧바로 집을 나섰다. 차 안에서 그는 정서연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병원에 있어?” “응.” 정서연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최재현은 이어질 설명을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자 금세 불쾌해졌다. “어젯밤에도 야간 근무했잖아.” “그래서?” 막 잠들었던 터라 정서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날카로웠다. “책상에 있는 이혼협의서에 사인했어? 끝났으면 택배 불러서 한 부만 보내 줘. 나 며칠은 병원에 있을 거야.” “이혼협의서?” 최재현은 순간 멍해졌다. “또 뭔 소리야?” “내가 이혼으로 장난칠 사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정서연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최재현, 우리 결혼은 처음부터 사고였어. 더는 너랑 정수아 사이에 끼어 있지 않을 거야. 예준이는 네가 키워. 돈은 내가 번 것만 가질 거고.” 그녀의 뜻을 알아챈 최재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서연, 너 이 정도 사람이었어? 예준이가 수아랑 친한 게 뭐 틀린 거야? 나랑 수아도 그냥 정상적으로 만난 거야. 어젯밤 식사는 수아 입사 축하 자리였을 뿐인데, 왜 그렇게 난리야? 넌 진짜 왜 그렇게 속이 꼬였어? 수아가 잘 되는 게 그렇게 보기 싫어?” 또 같은 말이었다. 정서연은 코웃음이 터졌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 그렇게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피가 모두 빠져나간 듯, 정서연은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았다. 서늘한 기운이 사지에 퍼졌다. 곧이어 휴대폰 알림이 연이어 울렸다. 모두 최재현의 메시지였다. [그만 좀 하고 빨리 돌아와. 병원에 있으면 창피하지도 않아?] [수아는 절대 다시 건드리지 마. 그러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 정서연은 단 한 줄도 답하지 않았다. 최재현은 채팅창을 노려보다가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가속 페달을 밟아 집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서랍 틈에서 정서연이 말한 이혼협의서를 찾아냈다. 마지막에 적힌 그녀의 서명은 하도 또박또박해 충동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예전에는 그와 결혼하려고 그토록 애썼던 사람이 아닌가? ... 다음 날, 최예준은 눈을 뜨자마자 정서연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탁탁탁 소리를 내며 최재현에게 뛰어갔다. “아빠, 엄마 없어요. 이제 영영 안 오는 거죠? 우리 이모 데려와서 같이 살면 안 돼요?” 그는 시계형 어린이 전화기를 켜 들었다. “지금 바로 이모한테 전화할래요. 제일 귀찮은 사람이 드디어 갔잖아요.” “밥 먹어.” 최재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최예준을 흘겨보았다. “아빠...” 최예준이 움찔하자, 최재현은 숨을 고르고 톤을 낮췄다. “얼른 밥 먹어. 곧 학교 가야 하잖아. 이모 데려오는 건 학교 끝나고 얘기하자.” “네!” 최예준은 기쁨에 소리를 지르며 밥을 열심히 퍼먹었다. 청소하던 도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정서연을 안타까워했다. 한편, 정서연은 전날 최재현에게 깨워져 잠을 설친 탓에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출근했다. 그런데 병원 현관에서 마주친 것은 정태석과 박경희였다. 그들은 그녀의 짙은 다크서클을 보고 또다시 정수아 일로 다퉜다고 짐작했다. 견디다 못해 박경희가 타일렀다. “서연아, 엄마가 그렇게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네가 재현이를 붙잡은 지도 벌써 6년이야. 이제 좀 놓아주면 안 되겠니?” 정태석도 낮은 목소리로 거들었다. “그래, 그때 네가 임신만 안 했어도 둘은 안 헤어졌을 거다. 재현이 마음이 너한테 없다는 걸 알 텐데 왜 계속 붙잡고 있니?” 정서연은 정성 들여 타이르는 부모를 싸늘히 바라보다가 가슴이 시렸다. 벽에 기대 가까스로 버티며 입술을 떨었다. “정수아가 재현이랑 못 사귄 게 제 탓이에요? 그 애가 다른 남자랑 얽혀 임신했다가 해외에서 낙태한 건...” “입 다물어!” 정태석이 날카롭게 끊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고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어둡게 굳었다. “어떻게 네 동생 명예를 그렇게 더럽힐 수가 있어? 아직 결혼도 안 한 애라고!” 박경희도 다급해졌다. “그래, 서연아, 여자한테는 명예가 가장 중요해. 우리를 부모라고 생각한다면 그 얘기는 네 가슴속에만 묻어 둬.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뭐요?” 정서연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삼키며 싸늘하게 물었다. 같은 딸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편애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박경희는 자신이 지나쳤음을 깨닫고 기세를 조금 낮췄다. “서연아, 부모 생각해서라도 재현이를 수아한테 양보해 주면 안 되겠니?” 입술을 깨무니 피 맛이 스며 나왔다. 밤새고 반나절을 굶은 탓에 현기증이 났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이혼하자고 했어요.” “정말?” 부모의 눈이 반짝였지만 여전히 못 미더운 듯 물었다. “서연아, 너 우리 속이는 거 아니지? 너...” 이후의 말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정서연은 어지럼증을 참으며 벽을 짚고 돌아섰다. 벽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새하얗게 질렸다. 왜 갑자기 이렇게 실패한 인생이 됐을까? 그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지나가던 간호사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얼굴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저혈당 아니에요?” 간호사는 손에 초콜릿을 쥐여 주었다. “이거 드셔 보세요. 드시고 나면 좀 나으실 거예요.” “고마워요...” 정서연은 쉰 목소리로 답하며 초콜릿을 꼭 움켜쥐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간호사조차 그녀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는데, 임상 경력 30년 넘은 부모는 왜 그걸 모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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