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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돈을 챙긴 뒤 백진우는 일부러 깊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저택으로 돌아왔고 불을 켜는 순간 검게 잠겨 있던 집 안이 번쩍 드러났다. 소파에 쓰러져 자고 있는 여자를 본 순간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술에 절어 쓰러진 여자는 지금이라면 손가락 하나도 못 들 것이고 저 가느다란 목은 그냥 힘 한 번 주면 간단히 부러질 것처럼 연약했다. 희끗희끗한 운동화가 마룻바닥을 밟았지만 발소리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조용히 다가갔다. 하지만 몸을 숙이는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눈빛이었다. “진우야,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백연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듯 냉담하게 말했다. 백진우의 호흡이 잠깐 멎었다. 그는 이 여자의 눈빛이 진심으로 역겨웠다. 마치 자기를 더러운 쓰레기, 어둠 속에 숨어 사는 쥐, 하수구의 해충처럼 보는 눈이었다. 예전보다 더한 경멸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강제로 입을 빼앗겼을 때 그는 추악한 반응을 보였다. 더는 놔둘 수 없다. 설령 같이 망하더라도... 두꺼운 안경 너머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보던 그는 그녀가 휘두르려던 손목을 낚아채며 움켜쥐었다. “백연, 그냥 죽어.”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목으로 뻗어갔다. 쾅! 백진우는 그녀의 발에 차여 바닥에 굴러 배가 끊어질 듯 아파 몸이 절로 접혔다. 백연은 소파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잡아 누른 채 그대로 올라탔다. 짜악! 묵직한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고 두꺼운 안경이 튕겨 나가며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얼굴이 순식간에 부어오르고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백연의 손바닥이 얼얼했지만 그녀는 한 번 더 사정없이 내려쳤다. “정말 내가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 새끼를 키웠네. 차라리 개를 키우는 게 낫겠다.” 백진우는 손등으로 피를 닦았으며 증오로 절인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낮게 웃었다. “백연, 너도 알잖아. 네가 죽어야 한다는 거. 네가 날 죽이든, 내가 널 죽이든. 둘 중 하나야.” 그의 독기 서린 말에 백연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유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이기적이고 잔혹한 얼굴인데 웃는 순간만큼은 기묘하게 눈을 붙잡아 끌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스치듯 긁었다. 부어오른 자리를 일부러 긁어대며 떨리는 그의 입술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 미워해? 진우야, 근데 지금 바로 날 죽이는 건 참 멍청한 짓이야. 넌 이제 겨우 열여덟이고 앞날이 얼마나 창창한데. 나 같은 악랄한 여자 때문에 네 인생을 통째로 버린다고?” “참... 바보 같아.” “그래도 누나니까 네가 나를 죽이고 싶다 해도... 올바른 길이 뭔지는 알려줘야지.” 백연은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몸을 깊이 숙였다. 입 끝에서 새어 나온 뜨거운 숨결이 그의 뺨을 감쌌다. “이렇게 죽여봤자 속은 안 풀려. 진짜 복수는 산 채로 지옥에 가둬두는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그의 입술을 덮었다. 잔혹하고 난폭하며 징벌 같기까지 한 키스. 터진 입술을 더 벌리며 피 맛까지 삼켜버리는 키스였다. 다음 날 아침. 백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식탁 위에는 이미 아침과 우유가 단정히 차려져 있었다. 그녀는 손도 대지 않고 먼저 시선을 들었다. 식탁 앞에 서 있는 백진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샌드위치도 한 입 베어 문 뒤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일상은 늘 이렇게 기묘했다. 독 안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뱀 둘 같달까. 독이 들었는지 먼저 확인한 뒤 백연은 그제야 우아하게 포크를 들었다. “누나.” 마른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가르며 튀어 올랐다. 백연은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늘 그는 안경도 쓰지 않았고 길어진 앞머리가 눈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대신 양쪽 뺨에 박힌 손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어젯밤은...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누나를 다치게 하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뜻밖의 태도에 백연은 피식 웃었다. 눈매에 스친 건 연민이 아니라 장난감 굴리듯 한 흥미였다. “앉아. 같이 먹어.” 백진우는 조용히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백연이 전화를 받자 신은아의 반쯤 야한 웃음이 바로 들렸다. “야, 어제 어땠냐고?” 백연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 끝에는 굳어버린 백진우가 있었던지라 그녀는 일부러 나른하게 웃었다. “어떻긴.” 신은아가 들뜬 목소리로 계속 물었다. “그 서빙! 너 데리고 갔잖아. 얼굴은 괜찮던데? 서비스는 어땠어?” 백진우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한순간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백연은 아쉬운 듯 입술을 비틀었다. “못 했지 뭐. 막판에 도망치더라.” “와, 근데 그렇게 잘생겨 놓고?” 신은아는 황당해했다. “글쎄. 허리 한 번 잡아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말랐어. 보기만 좋은 타입?” “에이, 그 얼굴이면 몸도 좋을 줄 알았는데!” “복근도 없더라. 난 좀 더... 힘 좋은 스타일이 좋거든.” 쨍그랑! 백진우의 손에서 유리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우유가 하얗게 튀며 바닥을 적시자 그는 곧바로 벌떡 일어났다. “얼른 치울게요.” 백연은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고 입가에는 어쩔 수 없이 미소가 스며들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신은아는 상황도 모른 채 계속 떠들었다. “그럼 다음엔 체대 오빠들 소개해줄게. 다 힘 엄청 좋아.” 백연은 가볍게 맞장구쳤다. “응. 난 깨끗하면 돼.” “맞다! 너 어제 말했던 주재현 일정 말인데... 알아봤어. 오늘 밤에 클럽 블랙에서 친구들이랑 모인다더라.” 주재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백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한여름의 햇볕이 뜨겁게 내려앉고 매미 울음이 과하게 시끄러웠다. “확실해?” “응. 근데 연아, 주재현은 갑자기 왜? 그 사람 쉽게 건드릴 상대 아니야.” 백연은 가볍게 웃었다. “높은 데로 좀 기어올라야지. 주씨 가문은 높은 집안이잖아? 나도 기대고 싶더라고.” 한동안 말이 없던 신은아는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 널 말릴 순 없지. 근데 조심은 해. 주재현 마음속엔 아직도 잊히지 않는 첫사랑이 있다며. 접근하기 쉽지 않을걸.” 백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덧붙였다. “솔직히...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전화를 끊고도 백연은 잠시 마당에 서 있었다. 주재현, 이 세계의 남주... 그리고 그가 평생 잊지 못한다는 첫사랑, 하지윤이었다. 지금은 해외에 있고 돌아오면 남자주인공과 얽히는 긴 비극의 시작이 된다. 원래라면 그녀는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백연은 거실로 시선을 돌리자 바닥을 닦고 있는 백진우가 보였다. 반항과 증오와 피폐함이 뒤섞인 완벽한 악역. 그리고 자신은 그 악역의 ‘악독한 누나’였고 역할은 자연스레 정해져 있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오자 백진우는 바닥을 다 치운 뒤였다. 그는 표정이 뒤틀린 채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남자가 필요해요?” 조금 전까지의 순한 태도는 흔적도 없었다. 백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난 성인이고 가끔은... 욕구도 풀어야 하니까.” 그녀의 대답에 백진우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딱 그 순간 백연이 그의 앞까지 다가가고는 무심하게 물었다. “너는 안 그래?” 백진우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자 그녀의 입가가 천천히 틀어지며 악랄한 웃음이 떠올랐다. “설마... 어젯밤이 첫 키스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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