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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프라이빗 룸을 나서자 백연은 주재현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주재현이 대놓고 무시했는데도 그녀의 기분은 이상하게도 좋았다. “주재현 씨, 저 오늘 주재현 씨 보려고 일부러 온 거예요. 혹시나 좋은 인상 줄까 해서 제일 싫어하는 흰색 원피스까지 꺼내 입고 머리도 반듯하게 폈다고요. 그래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까 정말 기쁘네요.” 뒤에서 떠들어대며 백연은 자신의 꿍꿍이까지 전부 다 까발리고 있었다. 마침내 남자의 넓은 어깨가 멈추더니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일말의 온기도 없었다. 그저 한없이 차갑기만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백연 씨, 전 백연 씨에게 관심 없습니다.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마시죠.” 과거에 백씨 가문과 주씨 가문은 어느 정도 왕래가 있었던지라 주재현은 그나마 그녀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백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전 주재현 씨가 좋은걸요!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 저한테 누가 좋냐고 물어보신 적 있었어요. 그때마다 전 항상 주재현 씨라고 대답했어요. 아마... 제 부모님이 그 사고만 아니었으면 저랑 주재현 씨는 약혼까지 했을걸요?” 어두운 복도 불빛 아래서 그녀의 까만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남자를 바라볼 때만큼은 정말로 애정이 가득한 듯했다. 하지만 주재현은 그런 그녀의 눈빛마저 모조리 짓밟듯 말했다. “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약혼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도 백연은 상처받은 기색이 없이 오히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 꽤 세게 나오네? 좋아. 난 이런 고집 있는 남자가 더 취향이더라. 나중에 나한테 푹 빠졌을 때 꽤 볼만하거든.' 주재현은 차에 올라탔고 백연을 데려다줄 생각도 없이 바로 떠나버렸다. 백연은 혼자 클럽 입구에 서서 그의 차가 멀어져 가는 걸 그저 지켜만 보았다. “허, 백연 씨의 재벌 남자 유혹하기 작전은 실패한 모양이네요.” 이때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백연이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최도영이 서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조롱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최도영과 말 한번 섞어본 적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남자가 구경하러 나온 거라는 건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여하간에 여자주인공의 ‘순애남'이었으니까. 오늘 백연이 하지윤을 흉내 내려고 흰색 원피스를 입은 순간부터 그의 시선이 따라올 걸 예상했다. 백연은 최도영을 마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그쪽이랑 뭔 상관인데요. 저리 꺼져요, 꼬리나 흔드는 댕댕이 주제에.” 예쁜 얼굴로 그런 말을 내뱉자 최도영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백연은 그런 그에게 바싹 다가가 붉은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일부러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용기를 내어 다가가고 있잖아요. 근데 그쪽은요? 그쪽은 친구인 주재현 씨한테 하지윤 씨를 좋아한다는 말... 할 용기 있어요?” 하지윤의 이름이 나오자 최도영의 표정이 확 변했다. “하, 지금...!” 그는 단 한 번도 하지윤에게 마음이 있다는 티를 낸 적 없었고 주재현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그 마음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백연은 대놓고 그를 흘겨보며 비웃었다. “왜요? 그 더럽고 비굴한 속내를 들킨 게 그렇게 창피해요? 주재현 씨랑 절친이라면서, 뒤로는 절친이 좋아하는 여자를 좋아하고... 와, 진짜 역겹네요, 최도영 씨.” “지금 제일 찌질한 건 최도영 씨예요.” 아마 정곡을 찔린 데다 말까지 너무 독했는지 항상 여유롭기만 했던 최도영의 눈에 드디어 분노가 피어올랐다. “백연, 입 닥쳐. 그 입 닥치라고! 네가 뭘 안다고!” 최도영의 눈은 분노에 붉게 물들었고 목소리에는 전과 달리 초조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럴수록 백연은 더 즐겁게 웃었다. 순진한 듯한 미소를 지었으나 붉은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뼈를 때렸다. “이래 봬도 나 아는 거 많아요. 내가 하나씩 말해줄까요? 최도영 씨가 겉으로는 바람둥이에 능글맞은 최씨 가문 아들이지만... 사실 모태솔로에 순정파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 “모태솔로인 것도 모자라 여자 입술은 한 번도 못 맞춰 본 순도 100%의 초짜라는 것도요. 하지윤 씨를 위해 순결을 지키고 있다는 건 확실히 대단하네요. 그런데요... 이젠 나이도 꽤 많은데 아직도 그 상태면... 기능은 정상인 건 맞아요?” 백연은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분노로 말문이 막힌 최도영은 그저 ‘너'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눈앞의 여자는 가면을 벗으니 한층 더 얄밉고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자기보다 거의 머리 하나 정도 차이 나는 키 큰 남자를 향해 백연은 발꿈치를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촉감과 달콤한 향기가 확 들이닥쳤다. 대비할 틈도 없이 이 모든 게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그녀는 혀끝을 살짝 밀어 넣어 그의 굳게 닫힌 이를 능숙하게 헤집었다. 멍해진 상태의 최도영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백연을 밀쳐냈다. 최도영의 긴 눈매가 놀람으로 파르르 떨렸고 붉은 입술에는 아직도 백연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백연은 살짝 촉촉해진 입술을 할짝대며 최도영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이건 생일 선물이에요. 고맙죠? 나 아니었으면 최도영 씨는 평생 키스라는 것도 못 해볼걸요?” 어차피 최도영은 여주한테 미친 듯이 충성하는 짝사랑 서브 남주였으니까. 그의 ‘순결남' 설정은 거의 인간이 아니라 신의 수준이었다. 남주는 주변에 예쁜 여자들이 몰려와 줘서 매력이 더 부각도 되고 여주와 사랑싸움도 하며 관계가 더욱 깊어지기라도 하는데... 최도영은 그저 그 둘의 사랑을 더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서브 남주일 뿐이었다. 최도영을 보는 백연의 눈빛이 아주 짧게 흔들리며 잠시나마 동정이 스쳤다. 최도영이라는 캐릭터는 여자의 입술은커녕 어머니랑 친척들 말고는 여자의 손도 못 잡아 본 설정이었으니까. 그는 화가 난 건지 창피한 건지, 얼굴과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여자, 정말 위험할 정도로 대범한 여자네.' ‘주재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근데 왜 나한테 키스한 거야?! 정말 부끄러움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사람이 왜 이렇게 뻔뻔해?' 늘 여유롭기만 하던 최도영의 머릿속은 지금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고 그 혼란을 뚫고 백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도영 씨, 나랑 손잡을래요?” 그 말에 최도영은 정신이 번쩍 들며 미간을 구겼다. “손을 잡다니요?” 백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를 보았다. “최도영 씨는 하지윤 씨를 좋아하고, 난 주재현 씨를 좋아하잖아요. 우리 둘이서 힘을 합쳐 그 둘을 갈라놓는 거죠.” 최도영은 시선을 내려 백연의 얼굴을 보았다. 백연은 정말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예뻤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말들이었다. 백연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난 최도영 씨를 도와주고, 최도영 씨는 날 도와주는 거죠. 우리 서로 원하는 사람을 얻는 거예요. 아주 완벽한 윈윈이죠. 하지윤 씨가 아직 해외에 있는 지금이 최도영 씨에게 유일한 기회가 될 거예요.” “귀국한 순간 내가 주재현 씨랑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알게 되면 최도영 씨 짝사랑 상대의 마음은 무너질 테고... 그때 최도영 씨가 끼어들어 적당히 위로해주면 넘어올지도 몰라요. 누구든 힘들 때 마음이 약해지잖아요. 아니면 설마... 평생 순애병 걸린 댕댕이로 살 거예요?” 백연은 느긋한 어투로 그의 표정 변화를 하나하나 전부 관찰했다. ‘순애병 걸린 댕댕이'라는 말이 최도영의 신경을 꽤 긁어버렸는지 짜증이 난 어투로 말했다. “난 그쪽을 도와줄 생각 없어요. 그리고... 하지윤 건들기만 해봐요. 건드리는 순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최도영의 깊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고 이 말을 내뱉자마자 몸을 돌려 가버렸다. 백연은 그의 뒷모습만 빤히 보았다. 거절은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그녀는 너무도 태연했다. 애초에 그는 여주의 ‘순애병 걸린 댕댕이'였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남주보다 더 공략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리고 또 다른 어둑한 골목에서 백진우는 조금 전 클럽 문 앞에서 벌어진 모든 장면을 숨어서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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