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송하린과 민재하는 학교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커플이다.
게다가 민재하는 어디에 있든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훤칠한 키,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검은 점퍼로 완성된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까지... 그의 존재감은 수많은 여심을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단 한 사람, 송하린에게만 머물렀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였다.
한 살 때 돌잔치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고 일곱 살 무렵에는 부모님들의 장난 섞인 약속으로 나중에 사도 맺자는 말까지 오갔다.
열네 살엔 처음으로 러브레터를 주고받았고 열여섯 살에는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두 사람은 같은 대학교에 진학하자며 서로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고3이 되던 어느 날 오유나가 전학 오면서 두 사람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담임선생님은 ‘1대1 학습 도우미’를 정하며 일부러 오유나의 파트너로 민재하를 지목했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재하야, 이 조건을 거절하면 하린이랑 교내 연애는 금지다. 알겠지?”
민재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공부를 도와주고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묘하게 변해갔다.
오유나가 해운구에 있는 핫플레이스의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하면 민재하는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고 몰래 케이크를 사다 주었다.
또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다며 SNS에 의미심장한 글을 올리면 민재하는 밤새 전화를 붙잡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심지어 생리통이 심하다고 하자 학교 담을 넘어 대추차까지 사다 주기까지 했다.
송하린은 그의 행동에 점점 화가 났다.
참으려 했지만 쌓인 감정은 결국 폭발했고 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첫 번째 이별 통보는 그렇게 전화로 이루어졌다.
민재하는 휴대폰 너머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거칠고 무거운 숨소리만을 내뱉었다.
그날 밤은 폭우가 쏟아졌다.
민재하는 빗속에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송하린의 집 앞에 서 있었다.
그 밤, 그는 밤새도록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목이 쉬어갈 때까지 간절하게...
두 번째 이별 통보가 있던 날, 민재하는 수업을 하루 종일 빼먹고 그녀의 교실 앞에서 기다렸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서툴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글씨로 가득한 두꺼운 편지를 내밀며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세 번째, 네 번째... 이별이 반복될수록 민재하는 점점 확신했다.
송하린은 결코 자신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는 걸.
그 후로 그의 ‘달램’은 점점 변해갔다.
예전엔 곧바로 그녀를 붙잡았지만 이제는 하루가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에게 아흔아홉 번째 이별이 찾아왔다.
...
고등학교 졸업식 뒤플이.
오유나가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자 민재하는 가장 달고 붉은 가운데 조각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는 순간 바로 옆에 송하린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듯했다.
‘내가 수박 가운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제일 잘 알면서...’
쌓이고 쌓였던 실망과 아픔이 그 사소한 일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차분하지만 더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하야, 우리 그만하자.”
민재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무심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또 삐졌어?”
송하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 나갔다.
민재하는 이번에도 끝내 쫓아가지 않았다.
‘며칠 뒤, 화가 풀리면 다시 돌아오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남은 친구들이 오유나에게 술을 권하자 그녀 대신 몇 잔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송하린은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걸.
반복된 상처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마음은 마지막 온기마저 식어 버리고 남아 있던 모든 기대 또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집에 돌아온 송하린은 컴퓨터를 켜자마자 망설임 없이 대학 접수 홈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민재하와 함께 지원하기로 했던 한서 대학교를 지은 뒤, 멀리 떨어진 연화 대학교로 바꿔버렸다.
그녀는 그렇게 모든 걸 정리하기 시작했다.
민재하가 선물해 준 한정판 인형들, 커플 팔찌, 손 편지, 사진들... 달콤했던 기억도 아팠던 기억도 이제는 버티기엔 너무 무거웠다.
송하린은 그것들을 모두 하나의 큰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상자를 들고 민재하의 집으로 향했다.
집사는 익숙한 얼굴이라며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를 들여보냈다.
넓은 거실 안에는 밝은 조명이 쏟아지고 있었다.
민재하와 오유나는 푹신한 카펫 위에 나란히 앉아 최신형 게임을 즐겼다.
“재하야, 너 진짜 대단하다! 난 이 스테이지 나 며칠째 못 깨고 있었는데!”
그때 송하린의 시선이 오유나의 옷으로 향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낯익은 검은색 티셔츠였다.
그건 작년 민재하의 생일날 송하린이 여러 매장을 헤매다 겨우 구해낸 한정판이었다.
그날 민재하는 송하린을 껴안고 빙글빙글 돌며 웃었다.
“하린이가 준 거니까 매일 입어야지.”
그때 속색이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거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매일 입겠다던 옷’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여자에게 내어주었다.
오유나는 송하린의 시선을 느끼고 해맑게 웃었다.
“하린아, 왔구나? 재하가 나랑 같이 게임하자고 해서... 아, 그리고 직접 파스타도 만들어줬어! 근데 내가 실수로 주스를 엎질러서 옷 좀 빌려 입었어. 괜찮지?”
민재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게임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왜 왔어? 우리 이제 끝난 거 아니야?”
그 말에 송하린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예전 그가 폭우 속에서 서 있던 모습, 진심으로 사과하며 편지를 내밀던 모습, 그리고 점점 차가워지던 문자 한 줄이 떠올랐다.
‘그만 화 풀어. 저녁엔 샤부샤부 먹으러 가자.’
민재하는 언제나 그녀의 한계를 시험했고 그녀는 매번 그를 용서했다.
그럴수록 민재하는 점점 더 제멋대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참고 또 참아온 마음은 결국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걸.
송하린은 이번 아흔아홉 번째 이별만큼은 정말로 끝내기로 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눌러 삼켰다.
“우리 헤어졌으니까, 네 물건은 돌려주러 왔어.”
민재하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버려.”
“그래.”
송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자를 집어 들었다.
거실 한쪽 커다란 쓰레기통 앞에 멈춰 선 순간, 그녀는 두 손으로 상자를 높이 들어 힘껏 내리쳤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상자 안 물건이 와르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