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그녀는 조용히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잠깐.”
민재하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우리 집에 있는 네 물건들도 다 가져가.”
그는 그녀가 예전처럼 상처받은 얼굴로 돌아서서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를 바랐다.
그러면 자신은 그만 싸우자고 말하며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송하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한때 두 번째 집처럼 익숙했던 이 공간에서 자신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현관 한켠에는 민재하가 특별히 주문 제작해 준 이름 이니셜이 새겨진 곰돌이 슬리퍼가 있었다.
부엌 컵걸이에는 그녀만을 위해 마련된 딸기 무늬 머그컵이 매달려 있었고 거실 소파 위에는 늘 그녀의 무릎을 덮던 연회색 담요가 놓여 있었다.
송하린은 그것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마치 아무 의미가 없는 물건인 듯 빈 상자 안에 담았다.
...
한편, 아래층 거실에서는 민재하와 오유나가 다시 게임을 시작하는 듯했다.
게임 도중, 오유나가 목이 마르다며 자연스럽게 민재하가 마시던 물컵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예전 같았으면, 결벽증 때문에 더럽다며 찡그렸을 민재하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저 힐끗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유나는 또 배가 고프다며 멀리서만 판다는 유명한 군만두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민재하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 키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송하린은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
송하린은 정리된 상자를 품에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몇 가지 물건을 챙기기 위해 민재하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문을 밀자마자, 오유나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오유나는 비웃음이 섞인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넌 재하랑 이 헤어졌으면서 아직도 여기 와서 존재감 찾는 거야?”
“난 그냥 내 물건 가지러 온 거야. 이제 완전히 정리하려고.”
“정리?”
오유나는 코웃음을 쳤다.
“너 지금 이렇게 밀당한다고 재하가 다시 봐줄 것 같아? 재하는 이미 네 변덕에 질렸어. 매번 헤어지자고 해놓고 결국엔 네가 먼저 돌아오잖아. 솔직히 말해봐. 넌 집착하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녀는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잘 들어, 송하린. 난 네가 좋아하는 건 전부 뺏을 거야. 재하랑 같은 대학 다닐 거라며? 상관없어. 나도 한서대 붙었거든. 앞으로 내가 재하를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들 거야. 그리고 넌 그 옆에서 내가 어떻게 널 이기는지 똑똑히 보게 될 거야.”
송하린은 그런 도발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상자를 안은 채 조용히 옆으로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오유나는 그녀의 팔을 확 붙잡았다.
“왜, 내 말이 정곡을 찔렀어? 그래서 말 못 하는 거야? 송하린, 너 정말 뻔뻔하다. 그렇게 질척대는 네 꼴을 보면 역겨워서 토 나올 거 같아! 재하가 널 귀찮아하는 이유를 알겠네. 네 부모도 참 대단해, 어떻게 너 같은...”
짝!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송하린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오유나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있었지만 부모에 대한 모욕만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오유나는 얼굴을 감싸며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이내 팔을 치켜들며 반격하려 했다.
그때, 아래층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민재하가 돌아온 것이다.
오유나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계략이 스쳤다.
그녀는 송하린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더니 곧바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그리고 그 손을 세게 끌어당기며 그대로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쿵! 쾅!
송하린은 온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
이마가 계단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히며 따끔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오유나도 크게 다쳤지만 그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자리를 잡더니 얼굴을 감싸 쥔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뺨에는 방금 송하린이 때린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재하야... 흑... 하린이가... 갑자기 날 때리고... 밀어서... 너무 아파...”
민재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오유나부터 살폈고 이내 바닥에 쓰러진 송하린을 내려다보며 호통쳤다.
“송하린! 너 미쳤어? 여긴 우리 집이야. 누가 내 손님에게 함부로 대라고 했어?”
송하린은 온몸의 고통과 어지러움을 간신히 참고 말을 이었다.
“유나가... 내 부모님을 먼저 욕해서... 그만...”
“닥쳐!”
민재하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변명 따위 듣기 싫어! 더 이상 말하지 마! 아저씨, 하린이 내보내 주세요!”
집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송하린을 조심스레 부축해 밖으로 데려갔다.
송하린의 눈앞이 캄캄해지는 거 같았다.
그 순간, 민재하가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오유나를 일으켜 세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오유나를 소파에 앉히고 약상자를 꺼내 상처를 닦아주며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의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듯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송하린의 가슴이 찢어질 듯 저려왔다.
그러다 그녀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이 스쳤다.
체육 시간에 무릎을 다쳤던 날, 민재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그녀를 업고 보건실로 달려갔었다.
“하린아, 울지 마.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때 그 다정함과 긴장은 오로지 그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민재하의 모든 배려와 인내는 다른 여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해명과 서러움은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채, 절망으로 굳어졌다.
송하린은 아무 말 없이, 피로 얼룩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현관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고 또 고통스러웠다.
...
병원에 도착했을 때쯤 그녀의 몸 곳곳에는 멍과 찰과상이 가득했다.
진단 결과는 경미한 뇌진탕과 여러 군데의 연조직 타박상이었다.
의사는 입원을 권하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입원실 침대에 눕자마자 송하린의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다.
오유나가 보낸 메시지가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도발적인 문장과 함께, 민재하가 그녀를 보살피는 사진과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는 오유나에게 죽을 먹여주고 사과를 깎아주며 병원 정원을 나란히 걸었다.
송하린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 모든 사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 한 줄의 답장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죽고 나니 이제는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